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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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11-17 18:50 조회2,7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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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과 그 동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마태복음 6:1-6. 16-18
추수 감사절 지키고 성탄절 지킨다고 엉터리 기독교가 아니다.
사람 사는 데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건강한 모습이다.
가정은 가정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기념일을 지정하고
함께 기억하고 되새기고 정체성과 연대감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입니까?
일상생활에서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있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지만
그래도 감사하고 되돌아보면서 성장하고 새롭게 다짐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이런 과정들의 연속이 인생이다.
인간의 오래된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검증된 경험은
고마워하고 감사할 줄 모르면 짐승이다.
인간의 오래된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검증된 경험은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늘 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분투』.................당신이 있어서 오늘 내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기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런 감정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괴악한 질병입니다.
표범은 나무에 자기를 다 내 맡기고 쉽니다.
빨래 줄에 빨래를 널듯이 나무 가지에 자기 몸을
걸어서 내던져놓고 쉬는 사진들을 보면서........감탄사가 나옵니다.
뭘 붙들고 경직된 내 모습! 너무도 초라하다.
✎.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물들을 통해서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추수 감사절은 이런 해탈과 비움과 내어맡김을 통해서 ...
화해와 용서 나눔 일체감을 경험하고 과거를 털어내고 가뿐해지는 축제
✎. 일차적인 주제는 영혼의 추수.......알곡과 가라지를 걸러내는 심판과 구원이.....
우리가 감사니 겸손이니 사람이니 하는 이런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이 선이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으면 공허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이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심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칙과 질서를 가지고 사랑으로 가족들을 돌보고 능력으로 필요를 채우면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바르게 자라갑니다.
큰 틀에서 그리고 우리들 영혼 깊숙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와 경륜을 아는 것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자기를 지키고
건강하고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마라』
내가 보이려고 안 해도 자랑 질 안 해도 하나님께서 다 보고 알고 계신다.
선행. 구제. 봉사 .금식. 기도. 설교. 간증. 공부..무엇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마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23장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위선자들에게 반복해서 화있을 진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잘한다고 하니까 신이 나서 더 잘 하려고 그렇게 인생이 굳어져버린 사람들.....
서커스단의 동물들처럼 그렇게 길들여지고 나면
자기 영혼이 다 털린 줄도 모르고 더럽고 비참해진다.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비굴해지고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는 갑질하고
자기 성질에 안 맞으면 다 쳐내고 .....
이게 마귀 귀신들이 하는 짓거리들인 것이 보이게 됩니다.
동기가 불순한 것은 아무리 큰 사업이라도 선행이 아니며
순수한 동기로 나온 것이라야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선행이 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으로서 자각이 필요하다.
누가 잘 한다고 하니까 인정받고 보상과 댓가를 바라게 되고 거기에 익숙해진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하고 당연히 해야할 사람의 본분을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인생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현실은 선행의 동기까지 따지는 일은 다시 없이 한가한 일입니다
부적절한 방법으로 취득한 재물로라도 공익을 위해서 내놓겠다고 하면
그 동기를 누가 따집니까?
과부의 돈주머니를 털기 위해서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고
부녀자의 허영심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가 아닌가?
불평등이 극심한 세상에서 동기의 순수성을 엄밀하게 따질 여유도 없고
누가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 마저도 안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그렇게라도 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재벌들이나 누구라도 장학 사업이나 복지사업에 기부를 하면
얼마나 나팔을 불어 줍니까? 온 세상에서 어디를 가든 공통된 현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재산의 일부를 팔아서 헌금했는데.....
오늘날 누가 그 동기를 묻기나 합니까? 물을 수도 없고 묻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동기야 본인의 몫이고 교회로서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기를 바라겠지요.
그러나 소박한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았다
악인은 차라리 회개하기를 기다릴 수 있었으나
이와 같은 착한 척하는 위선자, 허영심에서 나온 가면을 쓴 선행은
장려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시 용납할 수 없는
심판과 저주의 행위로 판단하였다.
현대의 지식인과 어부 베드로의 입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분명함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죄악 중에는 생존욕, 육욕, 재물욕 등으로 범죄하는
천하고 비열하고 야수적인 것이 있으나 이는 다 원시적 죄악이다.
그 범행의 악한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그 행하는 바에는 겉과 속의 조작이 없이 단순하다.
그래서 오히려 보는 자로 하여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고상한 범죄, 즉 교양이 있는 자, 종교가, 도덕가, 의인열사를 표방하는 자들이
범하는 죄는 겉으로는 완벽해서 시비할 거리가 없지만
‘은밀한 곳을 보시는 이’의 눈앞에서는 그 속마음에 불순한 것이
심하게 괘씸하고 얄미운 것이다. 가증하고 더러운 것이다.
전자는 교양도 없고, 종교도 도덕도 분별하지 못하는 자의 동물적 죄악이니까
인간으로서 이것을 훈계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는 그 범죄의 성질이 더욱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그 겉모습을 하얗게 위장하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는 각별히 엄격하고 혹독하게 이 동기의 불순함을 경계하신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 점에 대하여 그처럼 예민하게 다루셨는가?
‘삼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다소 불순한 것이 있어서 완벽하지는 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의’를 행하면 그래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義의이든 善선이든 그 의나 선은
그 본질상 남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 타락. 변질. 썩어서 곯아버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살아가는 연습이라도 해야한다.
의가 됐든 선이 됐든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덕이 됐든
그 본질상 의 선 도덕은 다른 그 무엇의 수단과 방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은 목적에 예속되는 것이다. 형편에 따라서 방편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의’는 규범이다. 규범이라는 것은 어떤 영향으로 변할 수가 없는 절대 개념
도덕이 어떠한 수단으로 쓰이면 그것은 이미 도덕이 아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선’은 방편이 되기를 거부한다.
善은 善 자신이 목적이어야 한다.
여기에 善의 善된 본성이 있고 도덕이 존엄한 이유가 있다.
➜. 인간의 양심이 국가의 헌법보다 더 위에 있다는 말은
양심이나 도덕성의 절대성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는 조건부의 의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이득을 얻기 위하려는 방편으로서
계산되고 연출된 선행은 그것은 벌써 선행이 아니다.
의의 가면을 쓰고 나오는 개인적 욕심을 이루는 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자기를 속이고 타인을 기만하는 유치한 소행일 뿐만 아니라,
실로 의의 존엄을 모욕하는 일이고
도덕의 신성을 모독하는 용서할 여지가 없는 죄악이다.
➜. 하나님이 그렇게 우습게 보여? 왜 좀비라하는가?
아나니아 부부가 베드로의 분노로 갑자기 요절한 것도 이 까닭이고
마술사 시몬을 향하여 그 돈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이고 받을 것도 없느니라. -행 8:20-21
마술사 엘루마를 주목하여 보고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행전 13:10
너는 나쁜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악당이다.
언제까지 너는 주님의 길을 훼방할 셈이냐?”
이 사건들은 다 의의 존엄을 분간하기 못하고 한갓 방편의 세계에서만 호흡하고
신성한 것까지도 함부로 농락하려는 무리들을 향한 진노와 심판이었다.
음행을 하고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는
“우선 죄 없는 사람부터 돌로 치라” 하시고
땅에 글씨를 쓰시다가 결국 정죄하는 자가 없음을 보시고
“나도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 범죄하지 말라” 하며 돌려 보내셨다.
또 십자가에서 오른쪽에 걸린 강도에게도
“오늘 나와 같이 천국에 있으리라”는 특사를 주셨다.
예수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부정한 여인 하나를 회개 시키기 위해서는...반나절을 달려가셨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된다고 해서 당대의 종교가와 도덕가들의 온갖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견딜 수 없는 분노로.....벼락을 치듯 진노하십니다. 禍 화있을진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도다.
다만 사람의 명한 것으로 도를 삼아 가르치니 헛되이 나를 경배하는 것이니라.”- 마15:8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
‘저희 모든 일을 남에게 보이고자 해서 차고 다니는 경문 띠를 크게 하며,
옷단을 넓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저자에서 문안 받는 것과, 선생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는 무리들’-마23:5~6
‘하루살이는 걸러 먹고 낙타는 삼키며,
잔과 소반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토색함과 불의함으로 가득하게 하는 자,
회칠한 무덤과 같이 밖으로 보기는 아름다우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마 23:24,25,27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거침없이 ouai 화 있을진저 마태복음 23장에서만 7,8회
보통 성인군자들과는 다르시게 지나치도록 진노하신 이유는 아주 간명하였었다.
의는 방편으로 행하기에는 너무도 존엄한 까닭이다.
자선은 순진한 자선으로만 할 것이다.
봉사함으로써 거기에 상당한 명예와 이득을 교환 조건으로 목표로 삼았을 때에
벌써 그것은 참다움 의미의 봉사가 아니다.
도덕은 오로지 의만을 목표로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의이신 하나님만을 목표로 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을 목표로 할 때에는
도덕은 벌써 가증스러운 허세와 위선으로 추락하여 버린다.
그러므로 다만 의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도덕의 목표가 존립할 것이요,
기타 털끝만큼의 불순한 동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 선과 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분만 제대로 화도 내실 수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살펴보아야할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가 도덕의 본성에 입각해서 천박한 인간적 보상을 기대하는 불순함을 없애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인간의 얼굴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자.
지극히 성스럽고 순수하신 하나님 앞에서 구더기와 같은 인간의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는 완악함에도 빠지지 않고,
인간의 온갖 칭찬함도 헐뜯음도 초월해서 오로지 정직은 정직을 위해서,
구제는 구제를 위해서 순수한 동기로 했다고 치자.
그런데 하늘의 常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賞給상급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대로라면 이도 역시
일종의 보상을 구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비열한 심정이 아닌가?
덕의 보상은 덕 자신이다는 근대적 고상한 윤리관에 비하여도
다소 결함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하늘에서 보상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성경를 일관하는 기본적 사상이다.
산상수훈의 8복. 천국에서 적다 하리라
또는 크다 하리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차이
인간에게 대가를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면서 의를 행함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곧 의와 선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②. 의를 행함과 하나님의 보상과는
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뗄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의심할 자 없이 의의 상은 영생이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고, 해가 지면 어둠이 지배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법칙이다.
우주의 자연의 다른 법칙을 그러하듯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를 행할 때에
하나님의 판단이 있고 그 결과도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을 믿는다는 말은
만물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게 무너지면 도덕의 기반 근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제일 먼저 걱정하고 염려한 사람? …………...토스토예프스키
그 러시아에서 소령 공산당이 나오니까
살인을 하면서서도 혁명과 숙청의 대상일 뿐이다.
내세 보상을 말하면서 충성을 선동하는
저급한 종교장사꾼들을 맞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똑같은 말을 하면서도 사람마다 천태만상입니다.....
바르게 믿고 잘 믿어서 잘 익어가는 풍성한 영적인 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들에서 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지만 하늘의 상은 하나. 영생입니다.
그 자체로 충분하고 완전한 은혜요 선물.
죄와 죽음이 없고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생명.......
그걸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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