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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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20-01-19 20:50 조회2,6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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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고전10:20-24
천국은 삼위 일체 하나님 나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신앙
바벨론 70년? 무엇을 기준으로 70년인가? 성전이 있어야 나라
인간이란 100% 하나님 앞에서 거지. 오직 하나님의 은헤로만 존재할 수가 있다
아버지 안에 아버지와 하나....예수님의 존재. 존재 양식.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영생. 그게 진짜 영광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된다.
창1:28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주신 복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지혜 능력 사랑...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자질을 복
이것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인데 어떻게 오늘날 상품화된 기독교는
내가 종교적 열심을 부리면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 보상으로 잘 되게 해주는
그러한 만사형통의 종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내가 한 만큼 결과가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고 의욕과 열심이 생긴다.
긍정의 힘, 적극적인 사고방식. 3박자 오중축복
물질적인 축복 성공과 만사형통의 축복. 병 고침이나 이적과 기적. 건강과 평안.
사실 나쁜 것이 아니고 마다할 것이 하나도 없는 얼마나 매력 있는 것들인가?
마귀는 언제나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
아주 좋은 말. 정말로 힘이 되고 위로. 잘 되게 해 준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피조물이다. 전적으로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어진 것이다.
다만 그 의존적 관계라는 것이 본능이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으로서도 가능한 관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라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해고시켜 버리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감당도 못하는 주제에......
그 후로 인간들은 인간의 영혼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인
진짜 福 바라크를 상실해 버렸고 채워지지 않는 그 福의 자리를
스스로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자원을 빼앗아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시도했고,
교육과 훈련과 수도를 통해서 그 공허함을 메꿔 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 자신들의 부끄러움. 공허함을 스스로 채우려는 시도....
무화과 나무 잎으로 가리고 치장하는 그림
바벨탑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심으로 옷만 바꿔 입고 성경에 나타납니다.
치장하고 꾸미고 허세 과시 자랑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염치를 모름. ....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구분을 못함
✎.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 하나님이 없는 것이 수치 부끄러움..
그것을 도대체 뭘로 가리고 덮는가?
무화과 나무 잎이어서 안되고 가죽옷 밍크 코트 입으란 말인가?
하나님 밖에는 아무도 하실 수가 없는 것을 사람이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
그러한 피조물의 자기 자리 이탈을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남 罪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부끄러움은 하나님께서 덮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덮으려 하는 것이 죄. 교만
✎.. 바리새인들 스스로 자기 의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으려고...
세리는 오직 긍휼의 옷으로 덮어주시라고.............
바벨탑 니므롯. 사울 왕. 압살롬..자기들 이름내고 자기 비석 세우고.......
그런데 인간은 원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인간의 교만과 종교심이 혼합되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샤머니즘 무당巫堂종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인 ‘나’가 가슴 한 쪽의 텅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는데
‘나’자신에게는 그러한 것을 충족시켜 줄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보호와 자신의 행복을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 보다 좀 잘나서 뭐라도 되면 자신이 곧 신이라고 하는 미친 인간들이 있다.
대부분은 그럴 주제가 안되니까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도와줄 힘 있는 존재와
자신 사이에서 중재를 해 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고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神이 샤먼 巫堂입니다.
그 무당은 직접 신과 접촉을 하고 교류를 해서 신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인간의 정성을 신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신의 도움을 빌어 병을 낫게도 하고
신탁이라는 형식으로 예언을 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무당종교는 고대시대나 시베리아,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곳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인 '나‘가 어떤 중재자의 도움을 받아,
어떤 힘 있는 존재로부터 복을 얻어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무당종교는
타락한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잠재해 있는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식하고 잔인한 밀림 속의 부족들에게도 모두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당종교에서는 자기가 도움을 청하고 있는
神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센 신을 달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복’만 받아내면 그만입니다. 오로지 현세의 ‘복’이 목적인 것이지요.
그 샤머니즘 무당 종교는 인류의 죄가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당종교인 샤머니즘은 인간의 모든 종교를 갈아서 먹어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샤머니즘 속으로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원래 불교는 무아와 몰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깨닫고
해탈을 하는 종교. 이 땅의 모든 것들은 단지 illusion그림자일 뿐.
자신의 육신을 비롯한 이 땅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됩니다. 왜? 샤머니즘‘은 인간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복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고등종교가 들어와도 인간 내면에 여전히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는
샤머니즘 위에 얹히게 되는 것입니다.
➜. 스님이 점을 쳐줍니다. 작명. 사주신수 四柱身手
복 받는 방법으로 연등. 기와도 팔아요.
절에 소원을 들어주는 칠성당. 삼성당이 들어섭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력을 빌어 육신을 가진 인간이
색에 속한 것들을 풍성히 얻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잡탕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제자들이 나무젓가락 들고 사리를 찾는 것입니다.
스승은 ’모든 것이 황이다’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다가 갔는데
제자들은 그 ‘없음’을 추구하던 사람의 몸속에서 ‘있음’을 찾는 것입니다.
허황 虛荒 잠꼬대 황詤
불교에 ‘찬불가’가 있다.
스스로 수도를 해서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적인 자력 종교인 불교에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찬불가’가 있습니다.
부처는 앞으로 나올 많은 부처의 본보기일 뿐이지
다른 이들이 부처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한 불교에서 ‘고마우신 부처님, 복 주시는 부처님’이라는 찬불가를 부릅니다.
이건 완전히 코미디죠.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인간들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현세에서의 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휴암 스님...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갔는데 너희는 지금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샤머니즘 위에 유교가 들어와 얹혔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교의 핵심은 인의 예 지 신...마음을 닦는
그래서 내가 예의로 섬겨야하는 분이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내어
그 대상이 죽은 뒤에도 ‘예의’를 표하는 것이 유교
그런데 이 유교가 샤머니즘에 얹히면서
‘제사’가 마치 죽은 조상의 도움으로 ‘액운’을 면하게 해주고
‘복’을 받게 해주는 종교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이유가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의 귀신이 삐져서 복을 안 줄까봐’입니다. 아닙니다.
유교의 제사는 죽은 조상이 주는 복과는 아무 상관없이
후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제사이다.
그런데 유교가 샤머니즘과 섞이면서
제사도 ‘복‘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조선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순교자가 그렇게 많이 나왔는지 아세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거부해서 식구들이 내쳤기 때문입니다.
‘저 놈이 예수 믿고 제사를 안 지내면 나까지 조상들에게 봉변 당할까봐’
일가 종친들이 고발한 것입니다.
급기야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조상의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묘 자리 ’ ‘명당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명당자리’를 써야 후손이 복을 받고 그 후손 중에 큰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명당을 써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복을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집념은
조상의 시신이 훼손이 되건 말건 자신들의 복을 위해 조상의 시신을 이리저리 굴립니다.
이장을 할 때 얼마나 조심조심? 왜?
잘못했다가는 재앙이 닥칠까봐. 이건 원래의 유교가 아닙니다.
유교 역시 잡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역시 제사도 지내고 예절도 갖추고 하는 유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있는데
진짜 유교는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샤머니즘’에 먹혀버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첨단의 전자 장치로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의 진수식 때
꼭 고사를 지냅니다. 첨단 과학의 결정체 앞에서 돼지 머리에 절하고
돼지 코에 돈을 꽃아 액운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를 찍을 때 어김없이 고사를 지냅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항상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합니다. 원혼을 달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샤머니즘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샤머니즘에 기독교가 얹히게 되면 어떤 것이 되는가?
역시 껍데기는 기독교처럼 되는데
그 속 내용은 여전히 ‘샤머니즘’에 머무르는 엉터리 무당 잡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적어도 집안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굿’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목사를 불러다가 예배를 드립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혹은 이사를 갔을 때 왜 목사를 불러다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혹시 그 예배를 통해 마귀가 주는 액운을 막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돼지 머리나 무당’이 목사로 바뀌고
‘고사’나 ‘굿’이라는 이름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맡기시는 것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동참 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이 망하고 흥하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업이 시작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업이 잘 안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업이 망함으로써 ‘내가 낮아지고, 이 땅의 것들이 무상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인식이 있다면 망했을 때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지요?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는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합니다.
사업이 잘 안 된 것이지 내가 망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나를 사업하고 동일시하는가? 사업 ≠ 영혼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사업이 망해서 목사님 모시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정도는 되어야지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나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이러니까 사람이 찌질이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시험 보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들. 당연히 기도해야지요.
학업이라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학업이라는 사명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학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잠자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찍겠습니다. 하나님 이 연필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찍는 대로 맞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정한 수 떠놓고 삼성당. 칠성당에서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사람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대부분 그런 의도로 기도하지요? 내 능력보다 더 잘 보게 해달라고.
겉은 기독교 적인데 속은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날을 미신처럼 복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은 아니다
주일날에는 자장면이라도 사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아요.
청년들이 주일 날 볼링 치러 가는 걸 목사가 묵인했다고 ......
이왕이면 하루만이라도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보는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딱 그 날만 그렇게 유난을 떨고 나머지 날은 엉터리로 산다면....이게 뭔가?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집 식구들이 목욕을 하지 않고 오거나
혹여 라도 딴 생각을 품으면 무당이 곧 ‘부정 탔다’고 외칩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목욕 재개하고 허튼 생각 품지 말고
오직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해 빌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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