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예배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02-03 14:33 조회3,03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고독한 예배자
창세기 28:16-19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 존귀함 운운하면서
사람에게 무슨 생명이 정말로 있는 것처럼
사람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곳은 교회는 아닙니다.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 존귀함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서 하나님을 없애버리고서도
대낮의 날강도처럼 인간으로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빼버리면 가장 인간적인 사회가될 줄 알았지만
가장 비인간적인 살인 집단이 되는 것이다. 살인이라는 단어도 없이 혁명과 숙청이 있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험성을 150여년전에 걱정한 사람이 있었다.
성경. 성도들이 보고 생각하는 각도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곳입니다.
밥 먹고 옷 입고 숨 쉬는 인간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잘 사는 길을 설교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게 잘 사는 인간을 성공했다. 살아있다.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싱싱한 젊은 그 얼마나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그걸 생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잡아먹으려고 키우다가 병들었다고 다 파묻어버리는 인간들.
개는 안락사 시켰다고 난리를 하던데 소나 돼지들은?
이런 가축들의 생명은 무엇이고 그러는 인간들의 생명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없는 인간. 하나님도 하나님으로 못 알아보는 인간.
하나님을 향한 아무 응답이나 반응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 말이 없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생명 없다는 말.
죽었다. 그러면 더 이상의 언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인권? 존엄성? 속지 말라.
죽었다 살았다 라는 말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말은 죽은 자들이 생명을 얻었다는 말....
그런데 무슨 생명을 받았습니까?
그 예수 생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그 예수님 생명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우리들 자신에게 무슨 생명이 있고 존엄성이 있고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생명이고 하나님이 인격이고 하나님이 사랑이고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가 있다.
하나님 없으면 우리는 그냥 흙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존엄하지도 않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주시니
내가 나의 있음이 비로소 의미가 있고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뵙고 응답할 줄 아는 것이 나의 인격.
물건 하나 하나에도 격이 있다고들 하는데 사람의 격 인격이란..........
하나님 없이 자신이 무슨 선하고 양심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세상의 지혜자들 철학자들 성인들 종교가들 다 엉터리입니다. .
자신이 무슨 선을 행할 수가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이 무슨 사랑이라도 할 수가 있는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 뭐라도 알아서 할 수가 있는 것처럼................
이런 이야기들이 전부다 에덴 동산에 찾아온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한 말들입니다.
그 말 듣고 감동 받았다고 하면서 은혜 받아가지고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
생명을 주셔서 받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스스로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미친 짓이다..
오늘도 선악과 따먹으려고 쳐다보면서 손을 뻗치고 있는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망하는 길.
아 나는 아버지 없으면 정말 개 돼지만도 못하구나 아이고 정신 차리고 아버지 집으로 가자
그리고 아들 자격도 없지만 머리 쳐 박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무슨 생명 무슨 인권 존엄성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저도 있다고 하면서 인간들의 자존심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고 있는 탕자에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지금 어떤 모습일까? ✎.탕자 = 야곱의 내면 세계를 극화한 것이 탕자
창48:15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그 분이 나를 챙겨주셔서 오늘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무슨 꿈과 야망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서 악착같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시57: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시12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시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복이 뭔지를 알고 살아가면 행복해집니다.
복 받을 그릇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행복해집니다.
복을 복으로 아는 지각이 깊어지고 풍성해지면 그만큼 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복된 자로 가는 여정은,
먼저 고독의 길이었습니다.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렇게도 무섭게 사람을 모든 관계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떼어내서 자기 앞에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흉내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도 못합니다. 하나님만!
아브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누구?
고독이란 하나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고독은 축복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정직하게 자신을 대면하는 기회.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키워가고 그런 바탕이 되어야 하나님을 우리를 상관하실 수가 있는 것.
우리는 때때로 많은 일과 사람들에 시달립니다.
어느덧 여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도 혼자는 있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혼자서 생활할 수도 있고,
고독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홀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임종 시간에는 글자 그대로 혼자입니다. 거의 많은 분들이 혼자 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약해져서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의존적인 인격으로 살아왔습니다.
예속된 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벧엘에서 돌베개하고 자면서부터는 혼자라는 것을 자각합니다.
멀리 있는 부모님. 형도 이제 상관이 없습니다. 혼자입니다. 그러나 복된 길의 출발이었습니다.
이 고독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하나가 loneliness입니다. 큰 행사 다음 허전함
또 하나가 'solitude'입니다.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나는 골방의 고독
이것이 적극적인 고독입니다.
그 고독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직선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이었습니다.
식구가 주렁주렁 많이 있어야만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다고 복이 아닙니다.
고독한 인간의 실존을 바로 경험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각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가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려는 데서 병이 듭니다.
세상의 문화라는 것이 외롭지 않으려고 거의 발악하는 수준입니다.
유흥문화라는 것이 잡기가 99%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인기나 명예를 구하는가?
혼자라는 것을 견디어낼 줄 아는 그 만큼만 그 사람의 신앙도 인격도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에도 홀로 살 뿐더러 홀로 결정해야 하고 홀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도 홀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아는 인격
우리는 고독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를
때로는 건강이나 재산을 빼앗기도 하시고 군더더기를 털어내 버리시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떼어내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당신 앞에 불러 개별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응답합니다.
그 첫째가 예배입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베개 삼았던 그 돌을 세워놓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습니다.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반응 응답하는가? 그게 나.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가장 귀중한 응답입니다. 그게 나의 인격이고 믿음의 실체.
우리들의 믿음의 성장 정도는 예배 자세로 가늠합니다.
항상 늦게 나오던 사람이 일찍 나오고,
항상 뒤에 앉던 사람이 앞에 앉고, 예배 시간 내내 졸던 사람이 정신 차리고,
설교가 안 들리던 사람이 설교가 들려지기 시작하고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기 시작합니다.…… 예배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자세가 바로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데까지 다듬어 가시고 바로 잡아가실 것입니다.
영화관에서는 절대하지 않는 일을 예배당에서는 종종 하는 일. 두 글자?
교회용어대사전에 나온다. ✎. 지각遲刻.
생전 성경도 읽지도 않던 사람이 기도를 하게 만드실 것이요,
세상일만 하던 사람의 소원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뭐가 진짜 일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듬고 고치고 개혁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자세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은 삶의 현장을 거룩한 곳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하루를 묵은 그곳은 시시한 허허 벌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슨 역사. 문화가 있고 작품이 있거나 유명 인사가 사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절)"라고.
야곱은 이곳을 벧엘 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깨닫게 됩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야곱에게 생긴 경외심....두렵도다.
우리들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우리들의 처지든 삶의 현장이든,
내 발이 내 몸이 있는 그곳 그대로가 하나님의 집 성전입니다.
이곳은 버려진 현실도 아니요 저주받은 현실도 아닙니다.
내 실수로 인하여 징계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 내 인생 그대로! 성전聖殿.나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 하늘 문이 열리는 곳......변화산. 마가의 다락방.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갈멜산에서 엘리야.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고 엎드린 곳에서 하늘 문이 열립니다
✎. 그런 장소를 성지라고하면서 또 성지 순례한다고? 그런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지금 여기 내가 살아가는 현장 그대로
㉢.내 인생 그대로가 영원이 들어와 있는 시간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인생이 아니라는 자각이 생깁니다.
창48:15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장소가 아니라 우리 인생 자체가 벧엘.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는 생의 현장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 나아가 지금의 남편과, 아내와 사는 것을
저주받은 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러시겠습니까?
그러나 그걸 뒤집는 것은 너무도 가까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逆賊?역적? 逆轉 아니 역전逆轉 드라마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자살을 순서만 바꾸면 살자
God is no where. ➔ God is now here. 글자 하나도 더하거나 뺀 것이 없어요.
✎. W理論 W = worship
있는 것 그대로 인데도 조합을 다르게 했어요.
W자 하나 있어야 할 자리에 제자리에 갖다 놓았을 뿐
내게 주어진 현실 이대로가 여호와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요 거룩한 현장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닫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아직도 긴 여정이 필요했습니다.
야곱은 20년 후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13년 동안 세겜에 머물면서 벧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을 벧엘로 몰아가십니다.
거지꼴이 된 야곱은 그제야 온 가족과 함께 original point--원점인 벧엘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그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놓고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과 직선적으로 만나서 약속한 것 바로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아오게 하십니다.
어떤 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복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독한 예배자로 돌아오십시오.
우리 인생의 모든 조건을 그대로 놔두고도 Setting만 다시 하십시오. 고개만 들어 눈을 들어 바라보라
"학교에서 우리말 쓰다가 선생에게 걸려 뺨이 터지도록 맞았다.
해방이 뭔진 잘 몰랐지만, 친일파 선생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러나 개학해서 학교에 갔더니 그 선생이 그대로 있었다." 예전에 임권택 감독이 했던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 맘대로 산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껍데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볼 줄 아는 영혼의 감각
창4:26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창12:8 거기서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35:1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창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시84: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믿음의 조상들과 그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특별하게 다를 것이 없다.
99%가 다 같아요.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고독한 예배자들입니다. 그게 그들의 Brand
아6:4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아6:10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6: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아6: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궁궐의 그 고품격의 우아하고 부드럽고 세련되고 균형 잡힌 아름다운 여인들이 구름떼처럼 많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해 빛에 그을려서 검게 타고 일에 찌들려있는
게달의 장막같은 술람미가 하늘의 왕. 하늘의 신랑에게는
그렇게도 예쁘고 곱고 엄위한 유일한 하나의 아내라고 하시는가?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디르사 예루살렘이 다른 성읍들하고 뭐가 다른가?
왕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내가 세상의 온갖 비싸고 좋은 것으로 만들어 입은 옷이 아니다.
신랑이 입고 있는 그 속옷 겉옷 그대로 입고 있다.
궁궐 저쪽에 있는 여자들에게 있는 것과 술람미에게 있는 것이 다릅니다.
저들에게는 넘 좋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술람미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랑이 준 옷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이 보내준 그 예복.
날마다 그 옷을 한 번씩 입어보는 것이 나의 힘이요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고독한 예배자만이 아는 하늘 문이 열리는 벧엘의 영광입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방향과 Target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고독을 필수입니다.
변화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다리 같습니다.
예배 기도는 찬양은 내 몸에 흐르는 혈관이요 피
계속해서 숨을 쉬어야 앞으로 나갈 수가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