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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웃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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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02-10 15:46 조회3,038회 댓글0건
설교자 : 김준봉 목사
설교본문 : 창세기 18:9-15
설교일자 : 2019. 02. 10

본문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8:9-15

맹수 중에도 가장 포악한  맹수가 표범. 

사자나 범호랑이는 길들이기가 쉽지만 이 표범만은 거의 길들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표범을 길들여 가지고 마음대로 타고 놀기도 하고, 

얼굴을 맞대고 부비기도 하는 그러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어느 아나운서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포악한 표범을  길들여 같이 지낼 수가 있느냐고, 

그는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비결은 웃음입니다." 

이런 맹수도 내가 웃고 그 웃음이 저쪽에 전달될 수 있으면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웃음 예찬.

웃음이란 참 위대한 것, 굉장한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먼저는 제가 그런 얼굴을 가지를 늘 소원이다.

그리고 그렇게 활짝 피어오른 맑고 밝은 얼굴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어두운 그늘이 없는 웃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꽃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독이 배어있는 인간✖

웃는 얼굴입니다. 깨끗하게 맑은 웃는 얼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선의로운 웃음은 반갑다. 악의로 웃는 웃음은 무섭다. 

 되는 대로 웃는 웃음은 천박하다. 전혀 웃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까다롭다." 

웃음도 여러 가지입니다. 기뻐서 웃는 웃음, 

기쁨이 가득 차서 가랑잎만 보고도 하루 종일 웃는 그런 웃음 말입니다. 

이것은 기쁨이 충만해서 흘러나오는 웃음, 그건 아름다운 웃음 입니다. 

그러나 이런 웃음도 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웃어버리는 웃음, 

허탈감에서 웃는 어이없는 웃음, 

비방하는 마음으로 웃는 비웃는 웃음.  "웃기네" 할 때 웃음.

또 억지로 웃는 웃음, 

우습지도 않은데 너 왜 나를  자꾸 웃기느냐 하며 억지로 웃는  웃음도 있습니다. 

사실 코미디언들이란 상당히 피곤한 직업. 무대에서는 웃지만.. 

무대 뒤에서까지  속까지 웃는 것은 아니다. 

영혼까지 웃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또 그런가 하면 거짓된 웃음, 간사한 유혹하는 웃음, 

생각하면 웃음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는데 

이것마저 오염되고 타락되었다고 생각하면 그지없이 서글픈 얘기입니다. 

 ✎.타락한 것? 진화?

이 정도만 이야기가 되어도 짚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 

진짜 웃을 줄 아는 사람 웃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 축복의 상징으로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가 자식이요, 하나가 땅입니다. ✎. 상징으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가지고

어쨌든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복은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을 보이겠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타이밍입니다. 어느 시간에 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축복하시는 과정과 그 방법...어떻게 가 문제가 됩니다. 

분명히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으면 첫날밤에, 한 달 안에 달라는 말은 안합니다.  

그래도 순리대로 1년 후엔 주셔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려 25년 후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만 지쳤습니다.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로 방황하며 살았고 

실질상으로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500년 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고 또 약속은 지키시는데 

그 시간과 그 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하나님만 바라볼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내년이 때에 아들을 주마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25년 전부터 말하는 것인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믿을 수가 있나요? 

오늘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오히려 믿을 수 있겠는데, 

25년 전부터  주시마 주시마 한 말씀을 오늘에 와서 또 내년에 주신다 하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늘 들어 왔기 때문에, 하도 많이 들은 얘기니까 또 들려도 그러려니 하고 맙니다. ...

✎. 하나님 사랑. 천국도 그런 것 아닌가요?

또 사라도  "이제 어찌 낙이 있으리오, 남편 나이 100세요,  

내 나이 90이며, 벌써 경수가 끊겼으니 무슨 낙이 있겠느냐"  했습니다. 

히11:12에는 "죽은 자와 방불하다" 했습니다. 

모든 생리적 차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를 하셔야지 

주시려면 진작 주시지 이젠 다 끝났습니다...그래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린 것입니다. 

 "참나 하나님이 웃기시구만!" 하며 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권능은 믿는데 그 현실성을  못 믿었습니다. 그는 바랐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기적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정작 준다 하실 때는 못 믿었습니다.  바랐고 믿었습니다만 

무한히 미래적으로 생각. 이상화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 이 세상의 천국이나 주시라고. ✎. 별의 별 천국이 다 있다.


Here and now 

여기에서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영생 천국은 못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걸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편법을 썼습니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의 소행입니다. 그는 방법을  좀 달리했습니다.

창 17:18에 보면 씁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다운 얘기입니다. 이 얼마나 깨끗한 고백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그는 말씀을 들은 때가 75세요, 

이제 십년을 지내고 나서 85세가 되고 나니까 안 되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고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무슨 수를 내야지 하여 

부부 합의 하에 하갈이라는 소실을 얻어 편법으로 얻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더 늦기  전에 무엇인가 편법으로 얻어  보려고 하는 그 마음은 극히 인간적입니다. 

그렇게 얻은 이스마엘.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안 죽고 살아남기를 원합니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인간적으로 합리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17:1에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왜 휘청거리느냐 내 앞에서 반듯이 서라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당화해 주기를 바랐으나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으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로 사라와 이삭을 대신하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닌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만들 것들을 가지고 행복하려고 합니다.

  

 

 ⓐ. 사라가 속으로 웃고  사라가 기가  막혀서 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고 부정하며 하는 말이

 ⓑ.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가라사대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어떻게 들립니까?

이 세 마디를 연결해 보세요.

 "왜 웃었느냐?" "아니오,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결과는 사라에게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관계를  그림으로 저장하십시오. 이것이 복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안개처럼 그림자처럼 허망함.

때로는 파다닥 타오르는 불꽃같지만 곧 사그러져 버리고

 榮華라고 해 봐야 풀의 꽃과 같은 인간.

자기의 우물 안에 갇혀 있어서 무슨 말을 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무상하고 초라한 존재임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  인식논리학. 세계의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저명한 학자이면 예수님을 알까?

    목사님들은 다 잘 아실까? 참 씁쓸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른 인간일까? 

사라도 이것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자식을 바라면서도 웃어야 하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왜 모르시겠습니까?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으니라." 

딸아 내가 너를 웃게 만들거야. 진짜 네 속에서부터 네 영혼이 웃게 만들거야. 내가 너를 평안하게...

만일 이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왜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비웃느냐" 이렇게 책망을 했다면    

사라는 이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못하여 웃어 버리는 이 사라를 결코 책망   하시지만 않았습니다. 

우리가 변덕스러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변덕스럽게 우리를 대한다면

 몇 사람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 정말로 우리가 행한대로 다 갚으신다면 우리 중에 구원 받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그저 어리석고 미련하고 약해서 이렇게 믿음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웃어 버리는 이 불쌍한  사라를 하나님께서 또  한번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복되게 할 거야.

룻3:1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 투성이입니다. 

체질화된 불신과 무능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까지 배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없어져도 이루어지는........................하나님의 언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성이나 불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웃었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창21:1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했습니다. 

21:6에 보면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의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했습니다.

✎.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음" 이란 뜻

이것은  진실한 웃음입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웃음입니다. 

죄와 죽음 마귀와 지옥을 벗어 버리고 승리한 웃음. 

햇빛보다 7배나 더 밝은 웃음입니다.

✎.고전 15장 부활장 마지막 부분에 승리 이김. 롬8:37

하나님께서 쓴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거짓된  웃음을 성실한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웃기신  것이 아니라 웃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의 이야기는 성경 동화가 아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4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부모님 사랑. 처자식 사랑. 자기 사랑...그 어떤 사랑으로도 하나님 사랑을 대신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덧입혀지는 그 사랑을 모르는 자가 되지 않기를

성공이나 부귀영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대신하지마세요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먼 미래적인 것만도 아니며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말의 장난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과 만족 기쁨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그리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내가 성취하고 이루어내는 자기만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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