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됨을 지켜가는 제자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05-19 16:56 조회3,05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제자 됨을 지켜가는 제자들
마태복음 26:36-46
예로부터 동양의 교육에서는 제자도弟子道를 강조하였습니다. 서양에서도 도제교육.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첫째 먼저 좋은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선생님을 잘못 만나면 못된 것만 먼저 배우고 공부할 마음도 없어지고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인생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힘든 것이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공부하는 것을 멀리하면 그 결과가 인간성이 자라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선생님은 내 쪽에서 선택하는 것 같지마는
실상 훌륭한 선생님은 膳物 주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아주 큰 복입니다.
그러나 좋은 제자도 스승 마음대로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
10년 20년 걸쳐서 맺어지는 스승과 제자 관계도 또 틀어지고..........
그게 인간 세상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제자가 되는 일 모두가
한 편으로는 은혜요 한편으로는 자신의 시험대이다.
둘째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어도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책가지고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학생다워야 한다. 본인의 의지와 열정이 중요하다.
15살에 지학志學 30살에 이립而立 40살에 불혹不惑.....이게 정상이다.
좋은 것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보고 배우고 익혀가야 합니다.
그런 수용성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
셋째로 끝까지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기술이나 지식만 얻으려드는 제자는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생활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선생님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절대 순종의 자세가 될 때에
비로소 훌륭한 사람,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세우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스승 밑에서 3년 동안 나무를 베고,
3년 동안 물을 깊고, 또 3년 동안을 아무 말 없이 밥 짓는 일만 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10년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생님 한 마디만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고
스승을 향하여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툭 툭 한 마디 던지면 그만입니다.
알아들으면 좋은 일이고 못 알아들어도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십년이 지났어도 아니다 싶으면 보따리 싸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알아듣고 배우려고 달려드는 제자가 비로소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며 남는 자가 제자입니다.
✎. 40. 50 대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교만이 고개를 듭니다. 그러면 끝.
옛 날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가 더욱 새롭게 생각해야 할 문제.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이었습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6:65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제자들이 스승을 택한 것이 아니고 스승이 제자를 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 인간의 잘남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열두 제자에게 이렇다 할 무슨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스승인 예수님께서 친히 택하셨습니다.
물고기 잡는 현장에서,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는 현장 에서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택하심과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꾸준히 제자 됨을 배우고 익혀나가고 다듬어지고 양육됩니다.
엎치락뒤치락 많은 실수도 되풀이하면서 예수님을 배움으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으로도 가르치시고, 행위로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정리해보면 그 2/3가 열두 제자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열두 제자를 집중해서 3년 동안 양육하시고 가르치시고 제자 되게 하셨습니다.
쓸모없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쓸모 있는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마침내는 이 제자들을 교회 기둥으로 세우시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허무주의 무신론 불가지론 이신론자들....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내가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 ➜실상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에 너는 하나도 쓸모가 없다...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자신이 무슨 의미 있고 쓸모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불쌍한 인간입니다.
열두 제자의 쓸모는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있게 된 것이지
결코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아가 노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고 사명을 주셨기때문
아브라함. 모세. 다윗이 그렇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내게 배우라. 나 있는 곳에 있으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하리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제자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라고 당부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일 따름이었습니다. 절대적 충성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위탁하고 따르라 하심입니다.
충성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다르게는 믿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잠25:13 믿음직스러운 심부름꾼은 뜨거운 추수철에 곡식 거두는 일꾼들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얼음물처럼 그 주인의 마음을 속시원하게 해준다.
중국 西安에 진시황의 무덤 그곳에 병마용兵馬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병마용은 창이나 활을 들고 있는 군사입니다.
사람의 서 있는 모습 그대로 흙을 빚어서 구운 것입니다.
2천 년 동안을 고스란히 보존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지금은 시커멓게 보입니다만
자세하게 보면 옛날에는 영롱하게 색칠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병마용의 얼굴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각각 다르다는 것 입니다.
사람의 크기와 똑같은 병마용이 4천개가 넘게 수없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가운데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죽을 때에 같이 죽어서 왕과 함께 하겠습니다.
오로지 왕을 위하여 함께 죽어서 무덤 앞에 서 있겠습니다'라고 자진하여
맹세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결심한 사람들을 죽여서 몸에 흙을 바르고 구웠습니다.
새까만 숯덩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시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수백 명의 병마용을 과장하기 위하여 똑같은 모양으로 수천 개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발굴된 것만도 4천 개라 하니 굉장한 일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왕이 죽을 때에 함께 죽는 것입니다.
후궁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하들도 왕과 함께 있겠다고 병마용이 되어서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의 광경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도덕적으로는 묻지 말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에 그 같은 충성이 있습니다.
가축들. 개. 자기 목숨을 내놓고 왕에게 간언하는 진짜 충신.....
우리 인간들이 다 알지 못하지만 무엇엔가 어디엔가 쓸 데가 있어서 있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도 충성해 본 일이 없으면서
그런 사랑을 해본 일이 없으면서 이러나 저러니 말만 많아.
누구나 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이고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그 목숨 그 인생을 충성으로 바친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충성을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 예수님 이름 팔아먹는 인간들.
교인들을 대표한다고 하면 자기 패거리 만드는 장로들
입만 열면 국민 나라 국가를 들먹이면서도 실상은 자기 챙기는 인간들.....
무슨 그럴듯한 말로 열변을 토해도 속으로 숨은 계산이 다 따로 있는
이기적이고 교활한 인간들에 비하면....
병마용으로 서 있는 충성된 사람들을 보고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들이 자기 치부가 드러나까 멍청한 짓이라고 욕하는 것이다.
정직함과 진실로! 겸손함으로 충성을 한다면...........이게 도대체 뭘까?
일반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람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 공부하며 겸손하게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좋은 인간성을 가지고 건강하고 복된 생을 살아가는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전혀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문제가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목적하시는 새로운 창조에 관한 것.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순교를 하여야 제자입니다.
핍박이 가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교를 하지 못하였다면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살아도 순교적으로 살아야 제자입니다. 잘 계산해보고 달려들어라. ...........
➜. 일방적인 자기 맘대로 믿음은 무의미 無意味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비유. ➀. 망대하나를 새우는데도 ➁. 전쟁을 하러나가면서
왕하 2:2-6절에 보면 제자 엘리사는 엘리야를 쫓아갑니다
.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분노가 격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양옆에 강도 둘만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나 황당합니다.
한쪽에는 강도가 있더라도 한쪽에는 베드로나 어느 제자 하나라도
함께 있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심각하게 문제되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셨느냐?
제자라는 사람들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요,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부인하고 도망갔으니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러고도 무슨 구원자인가? 하며 선생님이 시원찮으니 제자들도 이 모양이지.......
메시야의 위상. 메시야의 메시야 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 잘난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꼭 어디 한 귀퉁이라도 붙들고 있고 싶어 합니다.
베드로를 보고 가롯 유다를 보면서
자신을 보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허락 지를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롯 유다고 베드로라고 인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시원치 않은 제자 둔 탓에 예수님께서 욕을 입으시는 셈입니다.
아무튼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제자 됨에 실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ⅱ. 오늘의 성경 말씀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베드로같이 자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주십시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자는 늘 배우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따르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호언장담 합니다.
심지어 주위 사람과 비교하여 잘난 척합니다.
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2:33
➁. 심지어 예수님을 훈계하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 다시는 그런 말씀하시지 마세요 알았지요?
➂.오늘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가장 잘난 척하던 베드로가 가장 못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능력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가장 무능한 감도 안 되는 사람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일까요? 남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탈레스. 소크라테스
남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무책임한 짓입니다. 자기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간에도 너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누구누구는 학교 다닐 때 별것 아니었는데 요새 보니 돈 좀 벌었다고 까불어요."
가정생활. 직장이나 사회생활이 불편한 것도
남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좀 더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백정 기생 광대 무당
우리 나라 역사와 문화가 걸핏하면 양반이랍시고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 八賤 승려. 노비
조금만 아래로 보이면 하대하고...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계급사회 공장. 상여꾼
➜. 팔천八賤 ...승려. 노비 백정 기생 광대 무당 공장. 상여꾼
어디에서고 큰 소리 칠 자격 없습니다. 특별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 같은 죄인이요, 다 같이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 모세도 다윗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 말하면
베드로가 특별하게 교만하거나 갑질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에는
자기 성찰이 많이 부족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앞서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해놓고
어린 계집종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말에 호들갑을 떨면서 아니라고.....3번씩이나
예수님께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렇습니까'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인데
자신이 그렇게 무너지는 것을 용납이 안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참 모르시는구먼. 나를 고작 그런 사람으로 보신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아시는 나』
『 다른 사람이 아는 나』
『 나 자신이 아는 나』 는 다릅니다.
나 위주로 나를 보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고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왜 나를 이렇게도 몰라주시느냐고 원망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나를 알고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면
이제 와서 나를 고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좀 더 조심. 겸손해 질 수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원점으로 돌아가 있는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제자 됨에 실패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멘 할렐루야✘. 근심하며 대답합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자신을 깨닫고 제대로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저를 아시고 계십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비로소 제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나를 모릅니다,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ⅲ.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부활에 대하여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성찬식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말씀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알아서 읽을 수 있어야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말씀의 뜻을 몰랐습니다.
나름대로의 숨은 욕망과 자기 사랑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경고도 말씀의 깊은 뜻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까지 다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지금은 너희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세속적인 인간이기에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있지만,
장차 어려움을 다 겪고 자기를 부인하게 될 때에는
내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때에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와서 내 마음 사로잡을 때에 제자가 될 수 있고
권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변질된 기독교라는 종교에 갇혀 까막눈이 되면 참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ⅳ.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정신 못차리고 쿨쿨 자기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는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시고 다시 와보시니, 피곤한 모습으로 아예 널부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고 쉬라." 풍자적이고도 체념 섞인 듯한 말씀입니다.
다 끝났으니 마음대로 쉬어라 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는 자고 쉬라...45절"---기회는 이미 지나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나를 묶는 끈...
옷 꿰매듯이 실로 몇 번 감고 천길 낭떨어지 암반등반 하시려고
밧줄로 꽁꽁 묶어도.....한 번의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위험한 길인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라고 말씀하시고
땀구멍에 피가 쏟아지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시고
그리고 산을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하물며 제자가 기도 없이 어찌 같이 질 수 있겠습니까?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Lincoln, Abraham)은 전쟁터에 나가서도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시간에는 대통령이 있는 천막 문간에 흰 손수건을 걸어놓았습니다.
손수건이 걸려 있는 시간에는 아무리 급한 일도 여쭐 수가 없고
참모조차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답니다.
시간을 항상 정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손수건을 걷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절대 우선이요
기도 시간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은 많은 고백과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기도생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마땅히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고 때마다 기도하고
24시간 365일 일평생 기도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기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신랑과 신부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복된 관계라고 비유해서 설명하시는 것.
기도와 함께하는 생활만이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실패한 원인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할 줄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은 교만의 죄가 되고,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제자됨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기도하지 아니한 제자들은 이 명령에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기도생활을 하십시다.
그리하고야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으며,
함께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