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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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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06-23 16:06 조회2,972회 댓글0건
설교자 : 김준봉 목사
설교본문 : 창세기 3 : 1-10
설교일자 : 2016. 06 23

본문

                      성도의 자화상 1

                                            창세기 3 : 1-10


어떤 어리석은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며 세월만 보내고 있는 그에게 

그의 아내가 무명 몇 필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장사를 해 보라고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돈을 가지고 어떤 마을에 가서 참외를 한 짐 사 가지고  옆 마을에 가서 팔려고

지게에 지고  가다가 나무  밑에서 잠깐 쉬게 되었는데,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참외를 한 개 먹고 싶어도     

부인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당부한 말이 생각이 나서 먹을 수도 없고 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이것을 팔면 얼마만큼의 이익이 남을 테니  

그 남는 것만큼만 먹으면 되겠다고 하여 남을 이익만큼  먼저 먹었습니다. 

그리고 낮잠을 한잠 자는 동안에 동네의 좋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그 참외를 모두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낮잠에서 깨어난 이 사람이 참외가 없어진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익  남는 것은 내가 다 먹었으니 

그 참외 짐을 가져가 보았자  헛일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들으면 바보 같은데.....  

정작 내가 살아가는 모습도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전체적인 상황을 보아야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객관화해서 보는 것이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나를 말해주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자기 감옥에 빠지면 사람이 어리석어집니다.

자기 주장이나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면 전체적인 상황판단이 어려워진다.

일중심의 사람들. 자기 과시나 허세가 강한 사람들.

뭔가 보이는 것으로 결과로 자기를 알리려는 사람들.

그런데다가 재능이나 외모나 재물이 받쳐주면...99.9%는 자살 골을 넣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일의 경중을 분별하지 못하여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면서  변변치 않은 것을 쫓아다니는 

그러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이 대부분 세상의 모습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자기 성찰이 되고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시작해야합니다.

 

➜. ㉮. 우물 안의 개구리. 머리만 숨기는 꿩. 

      ㉯. 동굴 안에서 태어나서 동굴 안에서 자라고 동굴 안에서 죽었다. 

           이 사람에게 하늘은? 그 동굴이 자기 자신. 인간 세상

           왜 성경? 왜 하나님말씀? 자기 자신과 시간. 인간의 감옥을 벗어날 수가 있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현재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 내 자화상.

자기 자신을 속이고 

과장된 자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대단하게 멋있게 보이려고 거짓말부터 배우면...

 

 

우리는 인간입니까? 인형입니까? 우리는 동물입니까? 아니면 천사입니까?

인간이란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하고 모든 일에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동식물은 입력된 유전지도를 따라서 본능대로 살면 됩니다. 

개는 개 이상도 개 이하도 아니고 그냥 개같이 살면 되고 

다르게 살 수 있는 선택도 자유도 없습니다.

인형이나 꼭두각시는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건으로서 

사람이 움직여 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요소를  가지고 사는 인간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가 불가피성에 의하여 끌려가고  있는 꼭두각시 인형과 같은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과분할 정도로 칭찬을 하고 박수를 쳐도 아니면 욕을 하고 인격을 모독해도

결국 어떻게 반응하고 처신하고 행동할 것인가는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환경도 다른 사람도 부모님도 어느 누구나 무엇에도 책임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의 기본이다. 

그렇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고민하고 갈등과 몸부림이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동전의 양면.

  하나님을 안다는 문제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동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또한 나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나됨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에서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만들어지고 생긴 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맛이 간 것

본인이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피조물이 창조주를 모르면 자신이 곧 하나님이고 주인이고 왕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국은 동물이라고 결정해 버립니다.

✎. 산에서 벌목하는데 도끼 날과 도끼 자루가 서로 오늘 자기가 일 다했다고 한다.

      도끼 자루는 자기가 다했다고 한다. 도끼날은 도끼자루를ㄹ 보고 황당하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은 뭘 했는가? 사람을 빼버리고 나면...도대체 누가 벌목한 것인가?

 

➀. 인간은 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물건이 ✘. 화학적인 원소로 분석해서 구성성분을 말하면?

➁. 재능이나 외모? 가 곧 나?

     양심과 이성과 자유로 내가 내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부터 나이다.

    내 의자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과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은 엄연하게 다릅니다. 

   자신이 한 것도 아닌 것을 나라고 말하면 도둑이다.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태어났는가? ✘   

    진짜 나는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이 자기라고.

➂ 경제적으로 평가되어질 수도 없다........................ 돈. 소유 재물이 곧 그 사람이 아니다.

➃. 사회학적으로 논할  수도 없습니다.

     계급장. 모자. 지위나 사회적이 평판이 아니다...참고 사항

    그것은 참 인생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인생이 공허해지지 않는다........

✎.시험!.....사막에 혼자 1년간 살아보기.

몇십 만명이 모이는 대중이 있고 팬들이나 관객이 있는 곳에서는 펄펄 날아다니는데

사막에 혼자 놔두면 벌레만도 못해지는 무뇌 인간영혼이 없는 인간이 되면 인생 실패.

➜.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궁궐은 신앙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 인생은 다만  하나님 앞에서만 평가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의사 앞에서 옷을 벗고 진찰받는 한  사람의 환자의 모습이나 

엑스레이나 MRI 앞에서 Scan해서 

그대로 숨김없이 비쳐지는 자기의 내부를 보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직선적으로 서서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가 만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나를 보고 살피고 있는 그런 인간으로 

마음과 생각의 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해야

사람이 정상으로 작동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해야 그렇게 작동이 된다.

.

집에서는 내가 최고 인줄 알았는데 유치원에 가보니 아니네.... 

전교에서 내가 일등....그런데 전국에서 일등들만 모이는 곳에다 데려다 놓으니 

중간도 못가요. 왜 우리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만? 하나님 말씀이 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이란 말은 인생. 한 남자란 말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하고 부른 것은

 "인생아!"라고 부른 것으로 고쳐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장소가 아닙니다. 

실존. 존재. 사람됨입니다. 하나님 안에?  밖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보이냐?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리냐? 말이 씨가 먹혀 들어가는가?

대화가 가능한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엄마나 아빠가 아들! 부르시는데...왜요?

인간의 위대한 승리를 그려낸 감동적인 이야기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이야기들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

 하나님이 들려지고 보여 지는 자리에 당신이 있는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의 물음과 아담의 대답 속에 넌센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닌데 

아담은 장소적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어리석은 것은 숨어있으면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에도 숨어 있으면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답답한 일이다.

 

우리들도 자기 일에만 자기 입장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남의  말을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만 듣기 때문에 동문서답격인 엉뚱한 대화를 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에 눈과 귀가 어두우면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만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상대방만 비난합니다. 아 아 내가 오버했구나 하고 깨달으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물음은 뭘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셔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몫의 재산을 타 가지고 외국에 나가 살면서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거지가 되어 돼지 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쥐엄 열매를 주워 먹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처지에서 탕자가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에서 낙심하지 않고 

자기가 얼마나 악하고 못된 짓을 아버지께 저질렀는지 알았지만 

그러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할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는 얼굴을 들 수가 없지만 

자신을 기다려 주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그대로 주저 않거나 그대로 인생을 끝낸다면 자살골. 가롯 유다.  

아버지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담은 하나님이 물으실 때 계속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한 말은 

➀.  "두렵다"는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그러나 그 두렵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인을 모르는 고통에는 처방이 없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으로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병중에 그 치료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불과 1/5도 되지 않고, 

나머지 몇 만 가지는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은 물론 없다는 것입니다. 

아픈  것은 분명한데 그 원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으면서 

이 불안과 두려움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아담이 처한 현주소였습니다......

내 안에 居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집인데...

이 간단한 사실을 알면 인생의 모든 방황과 갈등이 끝.


 ➁. 아담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떠나서 변명을 늘어놓는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께 아내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하는 

책임 회피의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가  먼저 따먹은 사실을 몰라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이 바라셨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이 배가 갑자기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이 풍랑이 자기 때문이라고 하며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는 이 요나와 같은 "나 때문"이라고  하는 그 중심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항상 변명이 많고 자기 책임을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전가시키려고 하는 

그런 병리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변명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구차하고 초라한 일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왜  내게 아내를 주었습니까? 

장가를 안 갔으면 이런 죄 안 지었을  것인데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 상태가 이런 변명하는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엄연히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직장과 사회에 돌리고 가정에 돌리고 

심지어는 팔자에 돌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돌리는 

이러한 계속  변하는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명하는 동안에는  진실을 찾을 수 없고 

진실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행복과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다.

아담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한 마디만 용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용서해 주셨으리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내의 실수도 다스려야 하는  남편의 위치에서 

실수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키므로 인해 

남편 된 위치에서 아내의 위치로 전락했고, 

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물으실 때 하와는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림으로 인하여 

아내의 위치에서  뱀 위치로 떨어진 것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할복하고 자살? ...아주 비틀어진 건방진 문화이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부족한 사람. 죄인입니다. 도와주세요

 

➂. 숨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가 숨기고 가면을 쓰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영국의 어떤 기자가 열  한 명의 고위층 정치가들에게  당신이 한 일이 모두 발각되었으니 

빨리 피하시오 라는 무명의 전보를 쳤더니, 그 다음 날 한 사람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위장의 시대라고도 하고 위장  문화라고도 합니다. 

왜 이렇게 거짓이 많고 위장이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용물보다 진실보다는 포장이 더 굉장하다

진실보다는 쇼를 한다. 설교 예배 찬양 기도를 빙자해서 자기 일하는 사람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에 해가 뜨면 곧 말라 버리고 말 것.

그리고 하나님을 피해서 동산 나무숲에 숨었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우습고 허무한 이야기인가?

숨지 말고 하나님이 내 집 우리 집인 것을 알면 .......

세상에 그렇게도 단순한 사실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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