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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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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03-10 16:42 조회3,070회 댓글0건
설교자 : 김준봉 목사
설교본문 : 히브리서 4:12-16
설교일자 : 2019.03.10

본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2

                                                                      히브리서 4:12-16

그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다 합쳐도 티끌 먼지밖에 안 되는 것들이 사람인데....

그것도 한 순간 반짝하고 있다가 흔적도 없이 없어지는

그 허망한..... 구름 한 조각 일어났다 없어지는 

그리고 불꽃놀이 같은 찰나의 시간여행을 하면서도

영원자의 숨결이 느껴지고 영혼 같은 것이 느껴지는 말씀이 들린다?

자기 길이 있다는 것도 신비하고 그 길을 찾아간다는 말도 신비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경험해보지 않은 길이다.

우리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리 떠들어 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차피 전할 내용도 없고 들어야 할 내용도 없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이불 덮고 살아도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언어가 달라서도 아니다.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무슨 말이 들린다는 말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갈 길이라도 있는 것인가?

. 시간에서 영원으로 여행인데....

그러니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다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다 가늠해볼 수가 없다.

. 정말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성경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계22: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어느 산속에 두 마리의 산토끼가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를 노리는 천적이 많은 산속에서 

두 마리의 토끼는 서로를 위하며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양지바른 산 중턱에는 토끼들의 먹이인 클로버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먹고사는 걱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토끼의 먹이인 클로버 잎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숨어서 몰래 엿보던 토끼들은 사람들이 네 잎 클로버에

 '행운'이라는 이름을 붙여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토끼 중 한 마리는 이후 네 잎 클로버를 찾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봐. 오늘도 행운을 찾아 먹기 시작했어. 

어제는 열 개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 먹었지.

이제 나에게는 언제나 행운이 가득할 거야."

그러나 다른 토끼가 보기에는 네 잎 클로버만 찾느라 

다른 클로버를 잘 먹지 않는 친구의 몸이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습니다.

"네가 행운을 찾아다니는 동안 계속 약해지고 있잖아.

여우라도 만나게 되면 도망칠 힘도 없을 거야. 

나는 그동안 평범한 클로버를 계속 먹어

이렇게 살도 찌고 다리에 힘도 있는데. 

네가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이라 부른다면

나는 세 잎 클로버를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어.“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정말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정작 현실은 행운을 찾아다니는 모습

하루살이 같은 세상을 쫒아 다니면 행운을 바라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들으면서 양처럼 겸손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행복을 먹고 살 것입니다.


“몇 년간 같은 히트곡을 부르다 보면 가수한테 요령이 생겨요. 

그 노래에 자신이 생기는 거죠. 박자를 늘렸다 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항상 그 앨범을 녹음했을 때를 떠올리며 무대에 섭니다. 

‘오버하지 말자’ 되뇌면서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이렇게 들렸다.

 “초심을 잃지 마세요.” ...............이미자.

조금만 뭐가 좀 잘나가면 겉멋이 들어가지고 건방기가 철철 넘치면 자살골. 

 ➜. 성품이다.

 

아버지 기침소리만 나도. 할아버지 기침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이불 개고 요강 비우고 방 청소하고 마당 쓸고 어른들 일 돕고 

그리고 어르신들 숫갈 드시고 나면 그 다음에 숫갈 들고

그 집안의 분위기가 아이들 성품에 그대로 녹아들어갑니다.

 

고린도 후서 7:1을 읽다가 약속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 전후서에는 교회. 모임이라는 단어가 30번 넘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뜻의 약속은 두 번 나옵니다만 

교회란 그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암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독재자 아래서 서로를 감시하며 사는 국민들

신뢰라는 개념조차도 없는 불신의 막장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날 우리는 무슨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약속이란 오늘을 살아가는 힘. 원동력이 됩니다. 

내일이 있는 사람. 내세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고 들려집니까?    

성경이 읽어지고 믿어지고 보여집니까?

성경이 읽어지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영혼. 자신의 운명. 

자신의 영원한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 진리에 목마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들이 잃어가는 것이 하나 있다.

젊음만이 아니다. 약속이란 것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내일. 미래. 꿈을 잃어가고 과거나 추억을 먹고 산다.

행운이 아닌 행복. 성품. 집안 분위기. 그리고 약속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아버지 엄마였으면

 

 

포도원에 하루 품꾼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 데나리온의 삯을 약속 받습니다.

마20:13 .....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행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롬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고전15장에 성경대로 단어가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그대로

파스칼 같은 천재가 이걸 놓치지 않고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가 있는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 사도행전에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란 단어가 10이나 나옵니다.

행13: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요일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이 약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내세 영생 천국을 내가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내 구원을 확증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성경이요 성령님 하나님 한 분

벧후 1:4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성품을 알라 힘써서 여호와를 알자..호세아6:3

약속이란 말 자체가 동물이나 짐승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 

마술. 주문. 행운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단어가 약속. 성품 인격입니다. .

 

두 번째로 그러한 본질과 속성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 13가지 그림을.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나에게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는가?


그러면 이 모든 세 가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 안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분께서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경륜해 가시는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을 자신 있게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더욱 궁금해 합니다. 

오직 성경 안에만  자신의 구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경 앞에 더욱 더 진지해 집니다.

딤후 3:15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행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글 자체가 살아 있습니다. 

    죽은 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고 성령이 살아 역사하시고 

성경이 살아서 역사합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생명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내게  말씀합니다. 

누구에게나 개별적으로 현재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읽는 것은 비록 아브라함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통하여 내게 말씀하십니다.

 2천년 3천년  전의 사건이지만 마음 문을 열고 기도하면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실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의 증언.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➁. 또한 이 말씀은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90년대 초에 러시아 선교를 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처음 러시아로 들어오실 때입니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떠나오면서

 러시아어로 씌어진 성경 세 권을 사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모스크바  대학 정문으로 가서 막 나오는 청년 하나를 붙들고 

그 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청년은 묵묵히 성경을 받아들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다음날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어제의 그  청년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하더랍니다.

 "어제 밤새껏 이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귀한 책은 처음입니다. 

너무 좋은 책이라 이 사랑하는 친구 에게도 주고 싶습니다. 

한 권 더 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가지고 있던  성경을 마저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읽는 순간에 그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합니다.  

공산주의 이념 속에서 자라난 모스크바의 청년인데도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읽는 사람에게 지식을 주고 지혜를 주고 능력과 용기를 줍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생명을 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➂.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살아서 역사할뿐더러 치유 살리시고 성장케 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생명은 언제나 사망과 더불어 싸웁니다. 오늘도 우리는 음식을 먹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다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내게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야 

그  음식이  내게 유익하게  됩니다. 

우리 몸을 흐르고 있는 피 속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몸에 해로운 병균이 들어왔을 때, 임파구가 나서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 백혈구가 이기지 못하고 지고 말면 병에 걸리고 마지막에는 죽고 맙니다. 

심장이 뛰고. 피가 전쟁을 합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사망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웁니다.  

이 전쟁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악과 죄와 싸우고  불신앙과 싸우고 절망과 싸웁니다. 

무기력. 싫증 권태 유혹과 시험

생명의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허망해져본 적이 있습니까?  두려움을.

때로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까?  깜짝 놀랄 행동을 했습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그 이유는 내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요

인간 지식이나 내 의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벌써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내 입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내 눈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내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계셔서 내 마음을 주관하고 계실  때에만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악령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정결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조심할 것이니이다.

 

흔히 교회개혁에서 두 기둥을 꼽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요, 또 하나는 마르틴 루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탕아였다고 말합니다마는 따지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니교 철학에 심취한 자로서  타락은 했으되 철학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고 방탕했습니다.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보라'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3:12-13절을  읽으면서 비로소 중생하게 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  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무슨 대단한 철학적 진리도 아니고 신학적진리도 아닙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완전히 방탕한 생활  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고민으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마르틴 루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수도사로서 오랜 수도생활에서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의 문제를 말씀 가운데에서 해결합니다. 

롬1:17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수없이 읽어온  이 말씀이 

어느 날 새삼스럽게 그의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➃. 한편 말씀은 심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모든 것을 딱  자르고 분석합니다. 

신학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영혼의 그릇됨을 예리하게 잘라냅니다. 수술해버립니다. 

거짓된 위선, 율법주의, 가장된 바리새주의, 그릇된  심령을 강하게 비판해버립니다. 

또한 의사와도  같이 우리의  육체와 관절과 골수도 찔러서 해부해버립니다. 

사실 말씀에 강한 은혜를 받아서 병든  사람이 건강해지고 

육체가 새롭게 되는 체험을 우리가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비판하십니다.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날카롭게 비판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하십니다. 

13절에 "드러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드러난다는 이 말은 원문대로 보면  '짐승의 가죽을   벗기듯이'라는 뜻이 됩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벗겨버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거짓 위선 허세 음란 교만.......

성경을 읽는 동안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비판할 수도, 사랑하지 아니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그 사랑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잘못된 신앙. 그릇된 사상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악한 사람과  폭력을 숱하게  보면서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을 때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충분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철학.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회학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학이 사람을 그렇게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도덕이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하는 힘도 그 성경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말씀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고 말씀에 의해 성화 되어져 간다

눅 1:37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살전 2:13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여기 안식은 내용적으로 구원. 영생. 천국입니다. 그런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해놓고 바로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만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들의 눈을 밝게 해 주신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눈에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래서 우리들 속을 훤하게 꿰뚫어볼 수 있게 되고 내가 똥인지 된장인지 알게 하셔서

나를 기가 막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를 멘붕 상태로 만들어 버리시고 나는 어찌해야합니까 

이렇게 자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고 회개하는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죄 용서함과 평안을!

 

고후4:7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인간의 무능함이 어떤 상태인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다

 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생명의 말씀. 약속의 말씀으로

영혼과 가정 우리 교회가 더 건강하고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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