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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안을 네게 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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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9-03-31 16:34 조회3,149회 댓글0건
설교자 : 김준봉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14:18-20. 27
설교일자 : 2019. 03.31

본문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복음14:18-20. 27

 

평안이란 돈이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이란 전쟁을 해서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이란 담배한대 피워서 되는 일도 아니고

              술 한 잔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성공하고 높은 연봉을 받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평안이란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평안은 그 사람의 문제이다. 사람 외적인 것이 아니다.

 

우물은 오물이나 쓰레기가 채워지면 물맛이 간다.

우물은 계속해서 퍼내 주어야 우물이 우물로 지속된다.

자신이 기거하는 방을 쓰레기통 만드는 아이들은

자기 방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그렇게 만든다.

정리 정돈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걱정들은 배부른 소리들입니다. 교만한 마음들

오랜 시간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이 커지기만 합니다.

이제 그만 던져버리세요..  그 고민에 마음이 계속 붙잡혀 있으면 

당신의 몸과 마음이 굳은 채 더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걱정 할 것을 걱정하고 걱정할 일이 아니면 그냥 던져버리세요.

 

 

✎ ➀. 죄를 짓고는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양심을 거스리고도 평안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은 부풀리고......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평안해진다.

   ➁. 용서하지 않고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미워하면서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➂.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하고서도 평안 할 수가 없습니다. 

   ④. 하나님의 공의 법. 원칙을 지키지 않고서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⑤. 싸우면 지는 것입니다. 악을 대면하면 내가 악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걸려드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가 씨름하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다. 명확하게 아니요. No하면 됩니다. 그걸로 끝.

      마귀하고 말을 섞으면 당합니다. 개무시하고 말을 섞으지 마세요....하와가 그렇게 하다 당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예」가 있을 뿐입니다. 순종이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씨름은 죄와 싸움이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 맞짱을 떠야할 일이 있다면 떠야 합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죽임을 당하는 어린 양의 모습이고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싸움판에서 결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싸우지 마세요.

⑥. 사랑할 수가 있어야 평안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잘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다른 사람 각자 본인이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까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선할 수가 있어야 평안합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악해지면 평안도 도망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내 마음 먹기에 따라서 되는 일이 있고 

내가 아무리 훌륭하게 대단한 생각과 마음을 먹어도 

안 되는 일은 안 됩니다.

죽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죽음은 자기 체면이지

실재하는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거짓말로 평안해지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간계 奸計

 

⑦. 영원한 생명이 실재로 있어야 내 영혼이 평안해집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구원을 다 이해를 못해도 구원 받은 경험 확신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생물은 평안을 원합니다. 사람 역시 누구나 평안을 원하고 있습니다.  

안정이라고  말하든 평안이라고 말하든 평강이라 하든 

평화라고 하든 같은 말이고 똑같습니다.   

「신곡神曲」을 쓴 시인  단테는 

   평화란  모든 종류의 화살이 겨냥하는 표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가 평안을 원하고 있습니다.

 ✎. 지옥?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  

                선해지기를 포기한 사람들

       천국? 7째 하늘까지 있는데 첫째 하늘에 들어가는데 환하게 빛이 확 들어오는 느낌 

ⅱ.

    그런데 누가복음 19장  41,42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말씀하심

감람산 언덕 위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우시며 탄식하십니다.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평화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행복을 위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서도 아직도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평안을 지향하는데 진짜 평안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쫒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의 꼭대기 정상을 정복하고 거기에 서려고 하는데 

자신이 사다리를 갖다 댄 거기는 가짜 성공.

이상.목적 방향이 소원 그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어느 추장과 영국에서 온 선교사가 만나 이런저런  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있습니다“

   "몇 사람이나 죽이나요?"  "열 명 죽이나요? 백 명 죽이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천 명 정도 죽이나요?" " 아닙니다.  수천 수만 명을 죽입니다." 

그러자 식인종 추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백인들은 사람고기도 안 먹는다면서 뭣 하러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도 미쳤을까? 엉터리일까?


  마르크스는 '세계의 문제는 평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안하기 위해서는 경제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은 분명히 배만 부르면 평안합니다. 

그렇게  으르렁대고 약육강식의 무서운 싸움을 벌이지만, 

배부른 동물은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 무서운 사자도 배만 채우고 나면  

바로 코앞에서 토끼가 뛰어놀아도 해치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아하, 경제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모두가 배부르게만 살 수 있으면 되겠구나.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분배되도록만 한다면

 세상에는 평안이 올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큰 실수였습니다. 

사람은 이러한 점에서 동물만도  못합니다. 

동물은 저가 먹을 것만 먹은 다음에는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반면에 

사람은 가지고도 또 가지려 합니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다 소유할 수도 없을 만큼 가지고 있는데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는데 마냥 더 가지려고 하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된다고, 

     물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들도 내 손자도 돈만 있으면 평생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거지 같은 생각입니까?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미련함입니다.

   기쁨이나 평안 사랑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천박한 것입니까?

 

㉯.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이기적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쁨은 더불어 얻어야 합니다.  

더불어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가진 것을 자기가 꼭 가져야만 좋아하고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면 배 아파서 못견뎌합니다. 

나만 특별하고 유일해야한다나....

남이 못 가진 것만을 좋아하고, 

내가 성공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남이 망하는 것을 즐기고, 

남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그런 성향의 인간들도 있다는 것이........

 

 ㉰. 현재의 것만을 즐기려고 할  때에 행복은 없습니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현재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것이 그렇게 엉성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윤리적 논리적 정신적인 요소가  다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평강 이라는 것은 

건강,  번영, 행복, 자유,   정의, 화목, 승리...이 모든 것을 통합한  복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평강은 이기적이요 물질적인 데 반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평강의  특징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고 기초가 됩니다. 

이름만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도덕적 화평이 그 다음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는 평강이라고도 하지만 화평이라고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자기와의 관계로써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목이라는 관계 안에서 

물질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화평의  관계를  이루어갑니다. 

이러한 관계성을 가리켜 '복' 혹은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ⅲ.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 

예수님의 평안?

예수님의 생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을 섬기시고 봉사하시고 참으로 비참하게 사시다가 

역시나 비참하게 돌아가셨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기쁘셨고, 

예수님께서는 영광에 사셨다는 것이 보이십니까? 

십자가를 고난과 고통 아픔 상처 심판 저주로만 생각하시면 그것은 한 면이다.

예수님의 평강의 개념과 우리가 가진 평강의 개념이 다릅니다. 

본질이 에덴동산에서 부터 문제는 순종인가  불순종인가 입니다.

육신이 편. 불편.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문제.

순종하면 평안 불순종 죽음.

 

 ㉠. 받는 것입니까 주는 것입니까? 

 ㉡. 섬김 받기보다는 섬기는 기쁨. ......대장 노릇하는 것이 기쁩니까?     

 ㉢. 공작처럼 짠 하고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기쁜가요? 

   썩어지는 밀알로 이름 없이 죽는 것이 행복? 충분한 행복이 될까요?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걸 배우는 인생이 성도들의 인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받는 기쁨이 아니요.   섬김 받는 기쁨이 아니요.   웃 사람  되는 기쁨이 아니요

㉣. 부려먹는 기쁨이 아니요  ㉤. 놀고 먹는 기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너무도  평안하기만을 바랍니다. 

집도 좀 더 평안하고  몸도 생활도 다 평안   하기 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요새사람들, 전부 운동 부족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상당수의 질병이 운동  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앞에서 운전하는 사람과 뒤에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 중에서 

뒷사람이 먼저 죽는다고 합니다.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 오래 건강하게 삽니까? 

궁궐에서 온갖 최고 좋은 것 받아먹기만 하는 왕이 오래 삽니까?

뒷좌석에 앉아 있으면 30분도 못되어 졸고 멀미가 나는 사람도 

앞에서 떡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5시간을 달려도 끄떡없습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건강합니다. 노동자 목수 예수님을 기억 하십시오. 

노동을 싫어하면 정신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을 앉아서 놀고먹는 기쁨으로 잘못 생각하면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ⅳ. 요20장 19절 이하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3반씩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명령이요 인사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흔히 말하는 인사나 축복이 아닙니다. 이대로 될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능력의 말씀!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배고파서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평안치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

두려움 중에서 으뜸가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내가 의식을 하든 안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그림자가 없는 인간도 있을 수가 있는가? 

시간을 벗어날 수가 있는 인간이 있는가?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평안입니다.

 

어떤 외과의사에게 수술받기를 원하는 어느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수술 받은 환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퇴원한 뒤에 

 얼마 있다가 또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인사 받으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기로는 분명히 3년 뒤에는 재발해서 

다시 병원 으로 돌아와 영안실에서야 끝날 병인데, 

그것도 모른 채 찾아와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 때문 입니다. 

물론 치료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그때마다 

잠깐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일 뿐, 종당에는 영안실에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 영안실에서 끝나지 않는 인생도 있는가요?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해결을 얻기 전에는 아무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를 죽인 저들이 너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까봐 그러하냐? 

나는 부활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한 밤중에 혼자 골방에  앉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너희는 장차 나와 같이 될 것이라고 

확실한  미래를 보증하시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제자들이 지닌 또 하나의 두려움은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버렸으니 당신께서도 우리를 버리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도망갔으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마땅하다'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 가운데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6:33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십니다. 

마 28장20절에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저들은 의심에 사무쳤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직접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부활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지식이나 상식, 

인간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가는 부활이  무엇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으로써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얄팍한 인간의 지식의 한계에  매여 부활의 약속을 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만져보았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아는 것은 신비로움

어떤 이론이나 철학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쪽에서 설명한다고 저쪽에서 알아듣고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쪽과 저 쪽 사이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간섭이 있어야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되는 일이 아니다. 

그 믿음이 우리 영혼을 구원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알아가는 믿음이 생기면 인간의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고

부활을 알아가는 믿음이 생기면 

허망함 허무함 외로움  두려움 불안 이런 그림자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안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선물

인간들이 발명할 수 있는 것도

인간들이 발견해내는 것도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노력과 성취의 산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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