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영원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7-02-23 10:47 조회3,098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시간에서 영원으로
요한복음5;15-18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진짜 안식 즉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 거룩이라고 번역된 ‘카다쉬’라는 단어는 원래 자세한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의 신비함, 하나님의 위대함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 땅의 것과 구별되는, 하나님을 포함한 하늘의 것에 쓰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유일하게 거룩했던 것은 안식일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허무 공허함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하나님은 7일을 구별하시고 복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둠.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과 육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복입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 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 富貴榮華부귀영화
시간에 의해 두려워진 마음을 공간과 물질로 달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멋진 집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 안에 불안한 자신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열심히 아름답게 가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값비싼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합니다.
그도 물론 자신이 숨을 공간과 물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공간과 물질의 영역에서 공간과 물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복은 공간과 물질의 영역이 아닌 시간의 영역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그렇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간 중의 어떤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 거룩한 시간에 복을 부어 놓으신 것입니다.
☞. 왜 안식일. 주일을 지키는가? 왜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가?
그런데 그 거룩 카다쉬 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창세기 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그 거룩은 공간과 물질세계.
사람에게 처음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처음으로 쓰였습니다. 거룩한 시간
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는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력, 즉 복이 회복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오는 세상
즉 다가올 다른 시간 = 영원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대가 아니라 오는 다음 세대. 주의 날. 하나님의 날.
지금은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는 마지막 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때입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이 아닙니다 永遠.
안식일은 그런 하나님의 날을 씨앗으로 담고 있는 그림자 예표 약속 언약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다리는 행동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 행함이 있는 믿음.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 巨視的 眼目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고후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바울은 시간의 영역을 모르고 물질과 공간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잠자는 자라고 부르고
시간의 영역을 깨닫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새 생명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깨어있는 자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제발 이 소멸될 물질과 공간의 영역 속에 갇혀서 엉뚱한 방황과 허비를 끝내고
눈을 들어 영원한 하나님의 날과 그 나라를 바라보라’고 간곡히 권고. 권고. 권고
창세기 1:1의 태초에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시작이 있었다는 말은 끝이 있다는 말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시간이라는 말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창조되는 것임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란 영원한 어떠한 것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진짜 실재는 영원한 세계이고 이세상은 그림자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시간,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 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에게 주지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