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복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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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6-05-29 16:14 조회3,3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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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25
이 시 한편으로 여인들 사이에 국민남편이라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향한 구구절절한 사랑을 시로 담아내었습니다.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입니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이런 시의 대상이 된 시인의 아내는 죽어서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접시꽃과 같은 아내를 사별하고 난 뒤에 다른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을 만나고서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가구 라는 시를 한편 남겼습니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며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이 시인은 결국 장롱과 같은 아내와의 삶을 정리하고 속리산 아래로 들어가 혼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또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상대방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접시꽃과 같은 관계로 살 수도 있고, 장롱과 같은 관계로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짧은 시간 속에서 만남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어떤 자세로 살아야 우리에게 허락된 관계를 행복의 발전소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에베소서 본문은 관계의 원칙이라 불리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던
관계의 원칙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원칙
이 모든 관계의 원칙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공항에 있는 관제탑처럼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계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중심 말씀입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의 인간관계의 본질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 피차 복종하라
거미줄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줄이 방사형으로 얽혀있습니다.
종으로는 중앙을 향하지만 횡으로는 서로의 줄을 맞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찬 비바람도 견디어 냅니다. 이처럼 종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듯이,
횡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받들고 섬겨야 합니다.
수직적인 관계는 반드시 수평적인 관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계는 힘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은 일상생활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일요일의 하나님은 월요일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과 삶에 주인으로 받아들였다면
세 가지 관계에서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둘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셋째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관계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다는 이야기는 관계가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관계의 바탕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본다는 말.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듯
다른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 사랑이 나타나도록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에는 Gift-Love선물 사랑과 Need-love 필요 사랑이 있습니다.
Gift-Love선물 사랑은 한 가정을 돌보기위해서 자신을 다 내어주며 희생하고 헌신하는
아버지 남편의 사랑. 엄마의 사랑 같은 주는 사랑. 한 없이 무조건적으로...
Need-love 필요 사랑은 엄마 품속으로 파고드는 아이들의 사랑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 할 때에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Gift-love입니다
성부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에게 전 존재를 다 내어 주십니다. 주는 사랑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그대로 되돌려 드립니다.
그러나 Need-love 필요 사랑은 피조물 다운 사랑입니다.
닮은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같지 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무력함과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으로 자신 외에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병아리가 어미닭 품속으로 숨어들고 강아지들이 서로 엄마 젖을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우리가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필요의 사랑이 탐닉이나 중독으로 변질 되는 경우를 부모 자식간에도
이성간의 사랑이나 우정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속에 갇혀서 혼자 되는 것은 병적인 증상. 혼자 살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필요의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사실 거대한 필요의 덩어리입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공허하며 무질서한 존재인지를 인식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최고의 성숙한 경지에서조차도 나는 거지가 아닙니다 아무런 사심이 없이
순전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뻐기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창조주 앞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꼽 만큼이라도 가까이 가본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거룩함의 정점에 서 있을 지라도 그 순간 세리처럼
자신의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통곡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리가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서 있는 자기 자리입니다.
선과 악의 본질은 똑같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과 악인은 극과 극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빼버리고 나면
선인이나 악이나 자신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불순종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들더러 성인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悔改.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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