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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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22-12-11 08:58 조회1,14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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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33-39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새 시대에는 새 인물!
자기 편리한데로 자기 중심적으로
상대방은 몰아내고 자기가 자리 차지하고 들어서겠다. 나입니다
그럴 때 써먹는 말......온갖 좋은 말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써먹는 버릇...
정치 모리배들만?
악을 진실로 둔갑하게 만들고
진실마저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써먹는 모리배. 악당들...악인들.....
병든 자들에게 의원이 필요하다.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멀쩡한 사람보고 왜 병들었다고 그래 . 내가 왜 죄인?
진짜 신랑이 되는 나를 빼앗기면 나의 신부들이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다.
눅5: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잃은 신부들의 금식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천국을 담는 그릇은
인간들의 율법. 종교✘ 윤리도덕. 인간들의 자발적인 자기 열심?✘
..... 인위적. 자의적. 의식화✘ 무위? 저절로 자연히✘
껍데기로 보면 인위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금식해
『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혜로 금식하는 분들
비방하는 무리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우리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느냐? 그것도 세리의 집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하라는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레23:27,29,32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신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는 것으로서,
육의 죽음을 상징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처음 본재 자기 자리,
즉 죽은 흙의 자리를 직시하고 수긍하는 인간존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행위가 금식
대 속죄일의 금식은 그렇게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꼭 붙드는 순종과 자기 부인의 행위로 요구된 것이었습니다. ✎. 레위기 23:29-30
㉠. 스스로 괴롭게 하지않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성찬 앞에 서는 죄인들의 자세.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한 것....
떠들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
그런데 인간들이 기특하게도
일 년에 한 번만하면 되는 금식을 계속 늘려 갔습니다. ➜.슥8:19
스가랴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성력으로 4월과 5월, 7월과 10월에
각각 어떤 날을 정해서 금식을 해왔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늘려간 것이었습니다.
그게 계속 늘어나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
심지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1년에 104번
그건 율법도 아니었고 그저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 년에 한번만 하라고 요구하신 금식을
매 주 두 번으로 늘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금식을 통해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들의 경건함을 자랑했고,
이방인들과의 구별됨과 차이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밥은 굶기는 굶는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양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속죄의 은혜 앞에서 너희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고,
너희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자기를 부인하라는 의도로
금식을 명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우리는 이렇게 도에 지나는 금식까지 함으로
해서 하나님도 감동하시는 기특한 일을 하는 유일한 대단한 민족이라는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더 가관입니다.
금식을 함으로 내 육적인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과 가로막힌 혈을 뚫어서 더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더 능력과 불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대단하게 해서
하늘의 상을 받아보려는 아주 순진한 생각...정말 선한 뜻으로.....
그래서 능력이라도 나타나고 기도응답 받았다고 하고...그러면 대박인 거죠.
3일도못하냐? 1주일도? 세 이레는 해야지?
건강한 교회. 살아있는 교회. 이렇게도 열심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헌금도 하고
그 헌금으로 여러가지 하나님의 일을 하여 선한 능력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정말 모범적인 은혜로운 교회입니다? ✘✘✘
물론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금식을 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으로부터 오실 메시아에 관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야를 맞기 위해서는 금식이라는 자신들의 기특하고
경건한 행위가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이라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율법의 행위가 메시아를 맞이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예의이며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교묘하고 교활한 인간의 자기 자랑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속을 수 있다.
✎. 그렇게 특별한 열심을 부리다가 뭔 일이 정말로 대박이니면
100%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버립니다.
성공이 곧 맞다라는 공식으로 굳어집니다...
.이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뱃새다의 기적이 일어난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에 산속으로 혼자 숨어버림
죽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 맞다 그러면 그냥 죽는 것...
천하만국의 영광이 내 손에 들어와도....아니다 그러면 털고 도망가.....
이 분별력이 안생기면 당하는 것.
일의 성공과 실패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들이 힘들게 금식을 하고 있는 바로 그날,
예수라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의 비유 말씀인 것입니다.
✎. ㉠. 천국을 혼인잔치로 비유.......... 신랑은 예수님
㉡. 천국의 주인공이 지금 여기 있는데 무슨 금식이냐.....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에 어떤 효능이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예수님의 공로를 은혜로 꼭 붙들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인도케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 롬3:20 골2:16~17. 히9:10
㉢. 하나님의 구원은 신랑이 신부를 구원하여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는 이야기.
내가 당신 구원해줬다
구원 받아야 할 신부가 자꾸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면....
도움✘ 방해..그것도 정도껏해야지
출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의 인생 전체를 금식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신8:1-3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이유와 목적이 적혀있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라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과정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을 총칭 그래서 스데반은 광야교회라고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인생 전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낮추시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심......낮추시고 주리게 하신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
바로 금식이라는 단어......레위기의 속죄일 규례에 그대로 등장합니다. ➜. 레16:29-31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그러니까 이 레위기의 속죄 규례와 신명기 8장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성도의 인생은 금식의 삶인데
그 삶은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삶이고, 시험을 당하는 삶이며,
옛사람의 아사餓死 즉 주려죽음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나는 죽은 자에 불과하니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덮어 주세요. 라는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
금식이라는 자기 부정의 신앙적인 시위示威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의 왕으로 살고 싶어 하는 옛 사람. 가짜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지옥 죽음입니다.
생명도 없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십니다
그게 진짜 사는 것 생명 영생입니다.....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
그런데도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세상의 떡을 향한 정욕과 탐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내 생각 내 주장 내 욕심. 내 꿈 내 야망. 내 영역.
내 왕국이 더 중요합니다.....
옛 사람의 가치와 자랑을 위해 떡 주세요, 떡 주세요를
주문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진짜 금식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분명 신명기 에서는 성도의 광야 인생의 목적이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주리게 하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 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떡이 더 좋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죠?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진짜 금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 사 58:4~8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뭡니까?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여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주리고 헐벗고 약한 자들을 내 것을 털어 섬기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삶에서 완전히 돌이켜
다른 존재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 자아가 비워지고
자아가 죽는 삶을 금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성경구절들을 잘 보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는 자는
먼저 그런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가 먼저 그 능력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하나님이 거기에 복을 주고, 능력을 더 붓는 방식으로
금식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힘. 권세가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게 어디가 쉬운 일인가요...쥐꼬리만한 권세라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한 인간이.
생명도 없는 죽음 목숨을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을 한다고......
겸손한 척하면 그 겸손이 무슨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까?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척하면.....
성경에는 분명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 누가 있어
스스로를 괴롭게 함으로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모든 멍에를 꺾고, 흉악의 결박을 풀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겠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형상으로 낮추시면 그것을 금식
밥굶는 것을 금식? 상징적인 암시적인 것.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자기를 부인
하나님의 자기 비하. 그 고난과 죽음이 보일 때 두렵고 떨려지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보더 더 못한 것이 하나님의 금식을 보면........
이 분이 내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 성찬 앞에 설 때에 less than nothing......... 그 은혜 그 위로
내가 굶어서 다른 사람 먹이는 것.
내가 가난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내가 비워져서 다른 사람을 충만하게 하고
내가 죄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하는 것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
원수사랑. 이웃사랑을 누가 할 수가 있어서 이웃과 원수를 구원?
하나님 사랑?..율법사? 부자청년? 니고데모? ✘
예수님이 그 분의 공생애와 십자가를 통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40일 금식입니다.
40일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함축한 상징적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과 시험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요약하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보다 먼저 낮추어 지셨고, 주리시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유일하게 그 주리고, 낮추어지고, 시험을 당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지의 답안에 정답을 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모리아 산에 올라가고 있다. 그게 금식의 삶.....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취함
이렇게 신명기 8장의 광야 인생의 목적인 금식을 예수께서 온전히 성취하시고
그 금식의 삶을 우리 성도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그 예수의 금식을 내 것으로 거저 받아 금식을 한 자가 되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또 다른 금식이 필요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진짜 금식을 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
그 예수님의 금식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다. 새 술 생 베
그러면 그 새 술과 새 옷의 주인공들이
일차적으로 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신랑이 베푸신 혼인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감격? 감사?...믿음이 있는 척? 내가 만들어 내는 것✘
천국이 혼인 잔치. 그리고는 그 신랑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알고 싶은 갈망이 일평생 게속되는 것.
우리의 인생 속에서 연일 실패되어지는 금식의 삶,
즉 절대 주려 죽지 않고 있는 나의 옛 사람을 인식하고,
또 조금도 낮아지는 것 같지 않는 나의 옛 사람을 경험하면서,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식의 삶을 거저 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배우고,
예수님의 주려죽음과 예수님의 낮추어지심을 믿음으로
염치없이. 면목 없이 십자가만 붙드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깎여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자격, 우리의 열심 우리의 공로,
세상의 가치와 힘 등을 부인하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서서히 주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옛 사람을 주려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실패함으로 해서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이시는 것이지요.
그게 새 술을 담은 새 부대의 모습인 것입니다...금식의 삶..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삶. 나를 허물고 예수님을 세우는
내가 고멜. 창기. 세리 강도 도둑. 내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
용서받아야할 죄인. 실패라고 쓰는데도 - 성공으로 읽어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거룩한 신부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나는 지금 당장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어~ 내가 왜 이렇게 천국으로 가는 거야....
이 역설적인 인생들이 금식의 삶...나는 죽고 예수님으로사는 성도들의 삶
그런데 그 육이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의 사역 말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는 탄식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이미 금식의 삶을 살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서 금식의 삶, 즉 옛 자아, 육의 죽음의 삶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딜레마 속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탄식하면서 실패를 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성공으로 읽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금식의 삶, 옛 자아의 죽음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부활의 새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옛 자아를 주려 죽이는 금식의 삶에서 자주 실패합니다.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만을 숭배하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그때마다 성도는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러한 실패의 삶 속에서
사도바울과 같은 고통의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조금씩 놓아갈 때
그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께서 그 옛 사람의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고 채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금식의 삶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 당하는 자리에서 금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실패만 했는데
결국 그 공로가 우리에게 돌려지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아져 가는 모습. 천국이 세워져가는 모습.
이렇게 성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성도가 하는 일이라고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자신의 처음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성도가 겪어야 하는
자기부인의 삶이 금식의 삶으로 아름답게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처음자리가 뭔지도 모른 채
스스로 경건생활과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누가 생베, 즉 새 천을 헌 옷을 깁는 데 쓰느냐?’하고
말씀하신 것이고,
‘누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느냐?’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새 포도주와 새 옷은 절대 헌 옷과 헌 부대와 조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것은 헌 것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돌로 지어진 옛 성전이 파괴가 되고,
제사와 절기와 율법이 폐기가 된 것처럼 새것은 옛것과 절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생베는 헌옷을 찢어버리고, 새 포도주는 헌 부대를 터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심어져서 자라기 시작하면
나라는 인간을 다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 기르부으심이 임하면 글자로 쓰여진 법이 흡수 통합되버리는 것이다.
글자나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꾸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잘난 척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과 도에 지나는 헌신으로 개인과 교회의 명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 없고
사람과 교회의 이름만 드높이 날립니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목적이 뭡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입니까?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울타리 속에 감추어 둔
자기 자식, 자기 가족, 자기 재산, 자기 인기, 자기 명성,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면
다 헌 옷이요, 헌 부대입니다.
자신이 뭐라도 되려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름 석자가 그렇게도 중요한 사람들...다 헛발질 하는 사람들.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고.
자기가 머리가 되려고 하고. 자기 얼굴 내려고 하고.
자기가 중심에 서려고 하고....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선악과 따먹는 옛사람입니다
정말로 새 술에 취하면 그 옛사람이라는 헌부대는
다 터져서 새술까지 다 허비하게 됩니다...자기성찰이 필여한 것입니다
왜 착한 일 하세요? 왜 교회 일에 열심을 내십니까?
천국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안 하면 괜히 찝찝하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진즉 말씀하셨는데도....
인간들의 헛발질은 계속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몰라요.
그러니까 은혜에 대해 설교를 하면 그러면 이제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은 무엇인가요? 1년에 1번만해도 된다니까
그 한 번의 의미도 모른채 104번씩이나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과 뭐가 다르지요
은혜로 한 것. 성령의 감동으로 한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그냥 자기 열심으로 한 것이란 말 아니냐....
알고 보니 천국가기 위한 억지 행위였다면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냐?
우리는 천국가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고,
천국가기 위해 종교행위를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흙에 불과한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열심히 배우고 싶은 갈망이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
섬김보다 먼저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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