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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먼저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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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6-06-05 23:12 조회3,037회 댓글0건
설교자 : 김준봉 목사
설교본문 : 마태복음16:26
설교일자 : 2016. 0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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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중요한 먼저 할 일

                                                                                                  마태16:26

백정은 구 한말까지 5백년간을 일평생 천대만 받으며 살았다.

. 우선 머리에 상투를 못하게 했고 또한 머리카락을 다듬지(이발)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봉두 난발을(머리카락을 쑥대 밭처럼 엉크러짐)해야 한다.

      또한 갓이나 망건을 못쓰게 했으며 도포도 못입게 했다.

. 특히 백정은 호적에도 못 올리며 나라의 인구조사에도 제외시켜서

     사실상 거지보다 못한 최하층의 사람들이었다.

. 특히 슬픈 일은 백정은 죽어도 상여를 사용 못하며 시신은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다.

. 또한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가마를 탈수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신부를 지게에 지고 시집

     요즘말로 Wedding dress도 허락이 안 되었다.

. 특히 백정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집을 건축할 때 기와를 얹지 못하게 했다.

. 또한 길거리에서 양반이 지나가면 백정은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여야 한다.

당시 양반들은 나라에서 각종 좋은 혜택을 받으며, 과거 시험도 보며 병역은 물론,

세금과 부역을 면제 받았다. 그러나 간혹 양반이라도 죄를 지으면 가벼운 회초리 몇 대만 맞고

큰 몽둥이로 때리는 매는 자기 집 머슴이 대신 육모 몽둥이로 맞아준다. 

 . 인도의 불가촉 천민

. 또한 백정이 정부 관리로부터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해도 그것을 하소연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인권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인간 이하의 멸시 천대를 받으며 500년간을 살아온 백정들이

 구 한말 교회 출석  장로 선거에서 양반을 누르고 장로가 되었다.

그가 바로 백정 장로 박성춘이다.

박성춘은 1862년 서울 관자골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번 백정은 죽을 때까지 백정이기 때문에 백정의 딸과 결혼 백정 아들을 낳았다.

박성춘은 소를 도살해 주고 수고비를 받아서 살아가는 어려운 가정이었다.

박성춘의 가정이 풍지박살이 난 것은 허가 받지 않는 소를 몰래 잡아 주었다는 이유로

군관과 포졸들이 박성춘을 체포할 때, 그의 부인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다

그들이 휘두르는 육모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

 . 백정의 신분 자체가 그러니 사실상 글을 배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둘째 아들까지 병으로 사망하자, 박성춘은 큰아들 봉출이만은

천추의 한이 되었던 백정으로서 멸시천대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당시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의 서울 을지로1가 롯데호텔 부근에 있던 곤당골 교회 내에 있는 예수교 학당을 찾았다.

박성춘은 학교에 대해 조건을 달았다. , 내아들 봉출이를 무료로 공부시켜 주는 것은

     대단히 고맙지만, 아들을 교회에, 주일 예배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 학교도 학교지만 교회가 진짜인데....

이렇게 해서 아들 봉출이는 대대로 내려온 이 백정 집안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봉출이의 이름을 서양(瑞陽) 즉 상스러운 태양이란 뜻에서 박서양이라고 새로 지어 주었다.

박서양은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학생이 되었고 선생님들은 서양이가 비록 백정의 아들이지만

 성품이 바르고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서양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 에비슨 선교사

이때가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터진 해였다.

1892년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사무엘 포먼 무어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그가 처음 노방전도를 한 곳은 지금 서울 시청앞 롯데호텔 부근인 곤당골이었다.

그런데 이곳 곤당골 지역에도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무어 선교사는 특별히 백정들에게 더 많은 전도 활동을 했다.

한편 1894년 당시 전국에서 콜레라가 번지기 시작 하루 3백명씩 죽어갔다.

안타깝게도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도 이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자,

외국인 선교사 두 사람이 박서양을 앞세우고 박성춘을 찾아갔다.

두 사람의 선교사는 곤당골 교회의 무어 목사와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 박사였다.

이 분들의 치료로 백정 박성춘은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특히 박성춘이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란 것은

어떻게 감히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거지 취급도 못받는 백정의

거지 굴 같은 집까지 친히 찾아와서 진료를 해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박성춘은 며칠후 아들 서양이가 다니는 예수교 학당을 찾아가서

이제부터 아들을 주일 예배에 참석시켜 달라고 했고, 또 자신도 예수교 학당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박성춘은 글을 배워 성경을 탐독하면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그의 인생관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어 갔다.

그가 출석하던 곤당골 교회는 양반들과 정부관리 그리고 백정들도 많이 참석하여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 양반 성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양반들과 정부 관리들은 백정들과 한자리에서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무어 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즉 양반들은 예배당의 제일 앞에 특별석을 마련해서

백정들과 분리해서 앉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고 모두가 평등합니다라고 선언했다.

특히 백정은 광대, 무당, 기생만도 못한 가장 천한 최 하류의 신분이다.

한편 박성춘은 1895년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로서 교회봉사와 전도에 열성을 다하자

 무어 목사는 박성춘이 앞으로 교회의 큰 일꾼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앞서 특별석을 만들어 달라던 양반들

개나 소, 돼지 등 동물을 전문으로 떼려 잡는 백정 박성춘을 절대 교회에 못 나오겠끔

무어 목사에게 또 한번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일언지하로 거절했다. 백정들을 못나오게 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안 나오겠다

결국 양반들은 백정들과는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면서 새로운 교회를 따로 세워서 나갔다.

그 교회가 지금의 광교동 근처 문숫골 교회다. 교회가 분리되자 제일 크게 상심한 것은 백정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은 자기와 같은 백정교인들 때문에 무어 목사의 처지가 난감해지자 

그는 전도에 용기를 내어 매일같이 노방전도에 나갔다.

박성춘의 친절한 전도에 백정들이 하나둘씩 곤 당골 교회로 몰려오면서 교회는 활기를 찾고 크게 부흥했다.

. 한석진 평양 널다리교회 조사로 있을 때 마펫 선교사가 월급을 주려고 하자.....

"조선인이 조선인에게 전도하는데 왜 서 양인이 월급을 주느냐"며 이를 거절한 인물.

.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된 박서양

한편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예수교 학당을 졸업한 후 왕립병원인 제중원에서

에비슨 박사의 도움으로 의학공부에 전념하면서, 장차 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한편 에비슨은 미국의 대 사업가 세브란스의 거액 기부금으로 남대문 봉숭아골에

한국 최초의 병원을 준공하여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지었다.

한편 에비슨이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10년만인 1908637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됐다.

이 졸업생 중에 박서양은 후배 교육을 위해 교수로 재직했는데 그의 전공은 화학과 인체 해부학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병이 나면 한의사를 찾는 길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특히 수술로서 중병을 고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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