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인간의 절대불가능과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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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20-11-05 08:25 조회2,866회 댓글0건
설교자 : 김준봉 목사
설교본문 : 마태 16:23-26. 26:31-35
설교일자 : 2020. 11. 05

본문

     인간의 절대불가능과 하나니믜 은혜

                                          전적인 타락 불가항력적인 은혜

                                    마태 16:23-26. 26:31-35 

 

전 세계 기독교 교리를 양분하는 두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한 사람은 귀족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평생 탈선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반듯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일에 정도를 걸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사제 수도사였다.

다른 한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린 나이에 

거리의 창녀들과 어울리다가 열 일곱 살 연상의 여자와 동거를 해서

사생아까지 낳았고 서른두 살까지 마니교에 심취해서 인생을 탕진하다가

서른두 살에 암부로시우스 주교를 만나서 늦깎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 훌륭한 교육에 훌륭한 평판, 깨끗한 삶을 살았던 수도사 펠라기우스

그렇게 훌륭한 삶을 몸소 살아냈던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행함 중심으로 풀어낸 사람.

신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도 거기에 반응해서 신인협력으로 

구원을 성취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어다..

당연히 열심이 부족한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중도탈락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난다

그의 사상은 알미니우스에게 전해져 알미니언주의가 탄생이 되었고 

그 알미니언주의가 요한 웨슬레에게 흘러서 

오늘날까지 율법주의, 인본 주의 신앙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원죄를 부정. 자유의지 강조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가능성

목사님들중에도 이런 분들이 많다

우리가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자.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는 것은 맞는데......

. 우리가 열심히 해서 그 정도에 따라서 상급이 결정되는 것은 사이비

특이한 건 율법주의의 수장들이었던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훌륭하고 깨끗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고

정말 불교의 진짜 선승 스님들보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부리던 사람들이었다.

웨슬레 같은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두 시간, 혹은 네 시간 기도하고 

하루종일 성경 읽고 전도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홀리 클럽 같은 걸 만들어서 거룩한 삶을 전파하고, 경건한 삶을 독려하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 젊은 날을 창녀들과 보내면서 골수 마니교 신자로 살았던 

     그 사람이 어거스틴. 동시대 사람 345년에 출생.

율법주의의 대척점에서 오직 은혜, 오직 예수만을 외쳤던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처절 하게 선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의 삶이 얼마나 훌륭하고 존경스러운지.

 

세상의 가치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삶의 열매의 측면이나 

세상이 매겨낸 점수로 봐서는 율법주의의 깃발을 들었던 이들이

훨씬 대단하고 훌륭해 보입니다. 사회에 훌륭한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좀 더 밝고 깨끗하고 공평한 곳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멋지게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열심이 두드러진 사람들을 성도라 부르지 않는다.

. 열심을 부릴 줄도 모르고 상도 없다고 하니 동기유발도 안되고..........

누구나 똑같이 한 달란트... 그런다는데 누가 새벽 6시부터 나와서 일하는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사람인가로 평가되는 사람들이다.

쉬운 말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자신의 삶과 존재를 다 털어넣어버리고 

오직 예수 오직 은혜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능력으로 삼아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서 

나의 변화, 나의 성숙, 나의 발전, 나의 순결, 나의 거룩 등을 

세상에 증명해내는 대 열심을 부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 아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를 증명하려는 자기 열심을

무엇으로 포장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여전히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구원이 이미 완료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이 완료

구원은 펠라기우스나 알마니우스의 주장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하게 성장했을 때 완료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건 모든 인간에게 다 뿌려놓고 

일정한 수준에 올라오는 자들만 구원해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그 때에 선택된 자들에게 완료되어 

선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루어 내야 할 것은 

인간답고 싶다는 인간 보편의 꿈과 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절망이 먼저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의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인생들은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그 배제당하는 꼴을 절대로 인정하거나 감내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목숨을 던져서라도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챙겨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자존심을 자기 목숨보다 더 기치 있게 여기는 게 아담들인 것이다..

. 모하매드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면 그 사람을 참수시켜버리는 것.....

    자신과 모하매드를 동일시....... 경기. 선거들이 그렇다.

    이기고 지는 게임이 피를 불러 옵니다......

    자기 영역이 침범당하거나 무시당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예수 죽인 마귀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해야 되는데...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라는 치기 어린 고백을

하는 자로 믿음이 성숙되는 것이 진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가롯 유다같은 인간들하고는 달랐을 텐데....라는 

그 성숙의 자리로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고 하시니까 막아서면서

 절대로 죽으시면 안됩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고 했던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마귀야 하고 불렀던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 인간 보편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 전체를 

한방에 부정해버리시는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로 생명을 얻어 살게 되는 거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으로는 절대 예수님 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의지를 발동하여 목숨까지 걸어 

십자가를 막는 게 우리의 본분이 아니다.

 

. 목사님들에게 그런 권사님 장로님 계시면......... 

    상식과 예의를 생각해서라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되는데......

    그런 척이라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탄이라니.....

    죽을지언정 주님과 함께 가겠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3번이나 부인할 것이라니......


   1시간 만이라도 깨어서 같이 기도하자고 하는데도.....

   3번씩이나 부인하는 것도 부족해서 저주하고 도망가.....

   죽음을 이야기하는데도 서로 자리 다툼이나 하고 화내고......

   인간의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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