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읽는 탕자 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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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5-12-21 09:33 조회2,3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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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읽는 탕자 아버지 이야기
우리가 보통 「탕자 의 비유」라고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나는 「탕자 아버지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탕자가 아니라 「탕자 아버지」라고 읽혀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의 의도도
탕자가 아니라 「탕자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인류의 고전 총집합보다 더 크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인류의 전 역사가 이 이야기에 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이 이야기에서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생생한 장면의 묘사가
너무 Exciting하고 감동적이고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아침에는
형이 밖에서 일하다가 집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보고 화가 나서 삐져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집밖에 있는데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이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1. 인간에게 선이란 무엇일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 Coming Home」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 」이 없는 어떤 것도 선이 아니라 악이다.
인간 역사의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로 수렴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닌 것은 다 걸러져서 불에 던져질 것이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이 역사의 궁극적 의미요 목적이다.
인간의 선행과 윤리 수행 明心마음을 밝힌다고 하는 모든 지적인 노력
이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로 향하지 않을 때
그러한 인간의 노력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이 찧고 박고하는 모든 논쟁들이 무엇인가?
사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어떤 의미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말을 해서 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탕자 아버지 이야기」에서
탕자인 인간들이
무신론 유물론 불가지론 진화론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이런 이야기들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들려지는가?
이 세상밖에 없는 것처럼
육신의 정욕과 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에 올인하는 사람들
마치 이 세상에 사람들 밖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이런 모습들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여지는가?
2. 잃었다가 찾았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팔팔하게 살아있어도 송장이 있고
임종의 시간에 직면해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았는데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찾았는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들도 그런가?
아들 말고는 아버지의 잔능하심으로 얼마든지 다 하실 수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오직 아들이 있을 뿐이다.
그 탕자. 그 아들이 바로 나입니다.
아~~~~~~~~
이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가 있을까?
3.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의 전체가 다....
무엇을 하든
무슨 일이 생기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이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요
아니라면 우리는 즐거워해야할 이유가 없다. 정신을 차리자.
4. 성탄절은
이 탕자 아버지의 사랑이
이 아들을 찾으러 사람의 몸을 옷 입고 찾아오시는 사건입니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너무 황당하고 무례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탕자 형이 화를 내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의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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