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에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의 가르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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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1-06-27 21:03 조회4,1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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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의 가르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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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신자들에게는 곤궁한 사람을 도우려는 자발적 열정이 있었다.
이러한 실천의 배경에는 물질과 재화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친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교부들의 가르침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① 기독교에 의한 이교 세계의 가치관의 변혁 ⇒ 세상을 본받지 않고
② 인간의 탐심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
③ 물질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물질과 부의 목표이신 하나님
④ 자기 자신을 불쌍한 이들과 동일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과 나눔
1) 이교세계의 가치관을 버리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취하라. vs 세상을 본받지 말고
『디다케』의 편집자는 사람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가운데 한 길을 택해야만 한다고 했다.
생명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재물이 있는 자는 곤궁한 자에게 기꺼이 거저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청하는 모든 이에게 주고서 되돌려달라고 하지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각자의 선물들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Didache I. 1.5)
“궁핍한 자를 외면하지 말며, 너희 형제들과 재물을 함께 소유하며, 자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말라.
불멸하는 것들도 나누어 누리는 사이라면 없어질 것들은 더 그래야 할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디다케』는 지상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재물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동으로 쓰라고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유 중심의 이교 세계관에 반(反)해서
신자들은 재화를 나누는 것을 덕으로 여기도록 가르친다.
한편 2세기의 헤르마스의 <목자>(Shpherd)에는 교부사상의 골자를 이루는 문제들이 나와 있다.
헤르마스는 기독교를 일종의 거대한 건축사업으로 비유했다. 새 신도들은 높다란 탑을 세우는 데 쓰이는 돌들이다.
그런데 부자들은 “희고 둥근 돌”이다(Visions 3.6.5). 그런 돌들을 건축에 쓰자면 제 크기와 모양으로
다듬어야 한다. 부자들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부에 대한 애착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부에 대한 애착을 끊었다는 증거는 누구나 돕겠다는 마음 자세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선행을 열거하면서
헤르마스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과부를 돕고 고아와 빈민을 찾아 보라. 따뜻이 길손을 맞으며,
구박받는 채무자들을 곤란할 때 도와 주라!(Mandates 8.10)
헤르마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영주(永住)하는 사람이 아니요 이방의 나그네다.
따라서 이주민이 하듯이 어디에 안주하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재산 자체에 재미를 붙이고 긁어모으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헤르마스의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답을 사지 말고 곤경에 처한 영혼들을 사시오...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재산과 가옥을 이런 전답과 가옥에다 사용하시오.”
헤르마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신 이유는 하나뿐이다.
즉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의 신자들이 내세를 지향하는 자세를 배움으로써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없는 사람을 돕기 위해 재물을 쓰는 일에 부심했음을 알 수 있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재물은 일시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재물을 줄게 하실 것이다. 헤르마스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부를 획득하는 사업이다.
부자는 그들이 가진 부나 그들의 사업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한다.
이상적인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를 기반으로 한 사치나 필요 이상의 먹고 마시는 일을 중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에 손을 대거나 그것을 탐내서는 안된다.
그는 탐욕에 대해서 혹독한 단죄를 하였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자는, 하나님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라도 하나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행복은 이웃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형제들 보다 많이 갖고 싶은 욕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소유하거나 자기 아랫사람들을 꺽어 누르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웃의 짐을 져 준다면, 자기의 풍족한 것으로 곤궁한 사람을 도울 심정이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눔 으로써 자기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 신(神)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입니다.”(The Epistles to Diognetus 10.2)
이상과 같은 교훈은 이교세계의 가치관과 행복관을 배격하고,
성경적인 물질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적 가치관으로
이교세계의 가치관을 거부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3세기 초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러한 가치관의 변혁을 온건하게 논술하여
지성인과 교양인 및 부유층도 기꺼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청중을 분석하고서, 부의 문제를 매우 자연스럽게 논했다.
기독교윤리의 근본을 다룬 <교사>(The Teacher, <Paedagogus>)라는 저서에서
그는 인간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 부(富) 자체보다는 부에 대한 욕심이라고 하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클레멘트는 <교사> 2권과 3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상류 사회의 절제 없는 사치를 냉혹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공격하였다.
“사나이들이 은 요강이나 멋있는 설화 석고(雪花石膏) 변기를 내놓으며 으스대고 돈 많은 여자들이
금으로 만든 요강을 보여주며 주착을 부리다니 도대체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다.
부자들이란 어마어마한 짓이 아니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족속들인가 보다!”(Paedagogus, 2.3)
또한 클레멘트는 인간의 가치가 그의 소유나 부(富)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선 여성들에게서 겉치레를 치우고 주인들에게서 노예를 떼어놓고서 보라. 주인이라는 사람도 자기가 사들인 노예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행동거지나 외모나 음성이 전혀 다른 데가 없다... 노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은 더 유약하고, 양육 과정 때문에 질병에 걸리기가 더 쉽다는 점뿐이다.”(Paedagogus, 3.6)
그래서 클레멘트는 부자들에게 교만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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