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생각나게하는 교회 .3월 30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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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3-03-31 16:45 조회3,5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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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생각나게하는 교회
사도행전6:8-15 ,
7:54-60
당신이 가져야할 얼굴은?
미국의 대통령인 에이브라함 링컨은 자기의 못난 외모를 감추기 위해서
구레나룻 수염을 길렀다고 합니다.
링컨 얼굴에서 구레나룻 수염을 컴퓨터로 지워보니까
굉장히 추남에 가까운 얼굴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루는 링컨이 국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 맞은편 당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굉장한 욕입니다.
그러나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보시오! 내가 만약 얼굴이 두 개라면
왜 하필 이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소!"
그의 이 말로 온 국회에 폭소가 터졌다는 것입니다.
후에 한 지도자가 내각의 인물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거절했습니다. 그가 이유를 묻자 링컨은
"그의 얼굴이 마음에 안듭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추천하신 분이 정색을 하면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는 겁니까? 얼굴은 자기 책임이 아닙니다"
링컨은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40대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품고 있는 자기의 생각들이 세월이 오래 지날수록
얼굴에 나타난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인상 찌푸리고 살지 맙시다. 이기적인 생각, 육신적인
생각, 탐욕으로 가득찬 생각을 하면 그 얼굴은 추하게 변해 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스데반과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
예배드리기를 시작한지 4개월2주
교회에 비젼 대한 그림
가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청사진을 함께 나누고 같이 기도하고 그랴야 되겠구나
오늘 말씀은 "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집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목회 사역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의 의식속에
개혁자........................성도들은 개혁의 대상
선생님.......................성도들은 학생.
경영자.........................성도들은 평가대상
사업가.......................성도들은 투자가치
아버지.......................사랑 받아야할 자녀들
예수님 마음...........? 피로 값 주고 산 사람들
자신의 모습, 가정, 교회에서 에수님의 마음을 가지십시요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성경에 기록된 가운데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스데반
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스데반 교회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가장 아름다운교회 복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나게하는 사람으로 살다 가야 합니다.
그 사람을 보면 정말 예수님 같은 사람 성자 , 도덕군자×
예수님을 생각나게하는 사람 ○
에수님을 잘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에순님의 색깔과 분위기를 품어낼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증인인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땅끝까지 모든 족속들에게 예수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죽을 때에도 예수님을 생각나게 죽는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죽는 것마저도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길 마치고 본향에 들어갈 때에 천국에 입성할 때에
예수님까지도 자리에서 일어서셔서 맞이하는 놀라운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죽으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께서 앉은자리에서 일어서신 것은 순교자 스데반을 격려하면서 맞아들이시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교회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올라오는 순교자를 영접하는 순간이기에 기쁘게 일어나셨습니다.
많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셨는데
성경에 꼭 한번 오늘의 본문에 단 한번 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서 계신 것은 스데반이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스데반의 장엄하고 숭고한 순교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사람이 전해준 것을 그대로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이셨으며 순교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시는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순교자를 말할 때 바로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살다가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죽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셨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의 익나티우스 감독은 "자신은 주를 위하여 순교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떡으로 만들어지는 반죽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알고 나니까 자신도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대만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관광객의 가장 눈길을 오래 끄는 동상이 있습니다.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옷을 입은 한 사람을 세워놓았습니다. 그 동상은 "오봉
미셔너리" 라고 써있습니다. 오봉이라는 선교사의 이름입니다. 그 내용을 옆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 쭉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책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서 읽어봤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중국의 오봉이라는 선교사가 타이페이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산간에는 사람의 목을 잘라가지고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아리사」 라는 산에서 토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오봉선교사가 그곳에 선교를 하러 갔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다가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오봉선교사가 토인들도 다 존경해주고 받들어주고 섬겨주니까 다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오봉 선교사는 추장이 됩니다. 추장이 되고 난 후에 이야기 했습니다. 살인하면 안됩니다. 사람의 목을 잘라서 제사 드리는 일은 하나님께 벌받을 일이니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한 2년동안에는 제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년째 되는 해에 그들이 조상적부터 계속해오던 습관이 있는지라 사람의 목을 잘라 와서 또 제사를 드립니다.
말을 해도 안듣습니다. 그래서 눈물흘려 기도하다가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어느 해에는 몇월 몇시 어느 지역에 가면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있을 것이다. 그의 목을 잘라서 제사를 드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는
하지 마라. 그런데 바로 그 정한 시간에 자기가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고 지나가서 결국 죽었습니다. 목을 잘라놓고 보니까 자기의 추장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성대곡하며 토인들이 울고 그 뒤로부터 그 일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 선교사가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죽음을 면해주었습니다 이게 예수 정신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구촌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소망이 있는 것이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고 복 받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오봉 선교사....그 정신과 삶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그 얼굴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죽었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있었다"(행 22:20
스데반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 바울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믿음이 충만했다는 것은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 모습 사건 하나하나 전적인 신뢰
예수님과 너무 똑같아요
Ⅱ. 지혜가 충만한 사람
스데반은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신령한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역사 인식을 바르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봤을 때, 과거의 역사는 은총의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요셉, 모세와 수많은 선지자들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패역의 역사를 살았습니다. 요셉을 잡아 애굽으로 팔아버리고, 율법대로 살라는 모세에게 항거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패역의 역사를 산 그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순종과 보답의 새역사를 시작해야겠다는 역사관을 사도행전 7장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는 무엇이 실패이고 무엇이 성공한 인생인지 올바른 판단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서 일한 사람
죽어서 일한 사람
Ⅲ.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
살아있기는 살아 있는데 한데 힘이 없는 믿음×
그리스도는 은혜가 충만한 분이셨습니다(요1:14). 이런 그리스도의 종된 스데반 역시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란 매력적이고 친화력이 있으며, 평안이 찾아오게 만들며, 희망과 감사가 생기게 하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 스데반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권능의 태풍같은 힘으로 대적자들을 쓰러뜨렸습니다. 오늘날 인기나 존경, 신뢰, 돈, 권력이나 외모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능력
사람을 평안케 하고 깨끗하게 하는 능력..................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권능을 받아 하나님의 증인이 되라고 나와있습니다. 권능을 받으면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Ⅳ. 스데반은 사랑이 넘치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은 구제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손을 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의 손을 펴서 언제나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증거-----(행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그런데 스데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죽었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죽을 때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자신을 향해 돌로 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예수님께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은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입니다.
ⓐ. 광야에서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막 6:41).
ⓑ.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요 11:41).
ⓒ.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락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중심을 하늘에 맞춘 것이요 곧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실패 가운데 최고의 실패는 사는 목적의 실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일에 실패하면 우리는 실패한 인생
예수님의 얼굴, 예수님의 모습 그 정신 mind
스데반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절)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즐겨 쓰시는 대명사입니다
막 10장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인자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였습니다. 죽으러 온 예수는
희생하며 산 예수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믿었고 그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인자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닮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고 죽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원수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성령이 충만하고 스데반은 입을 열고 저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맹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씨는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신학교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포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같은
포로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 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그는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1861-1865 : 남북전쟁을 이끌었던 아브라함 링컨
의 이라크 전쟁을 이끄는 죠지 부쉬
일년에 국방비를 4000억 달러(500조 가까운 돈)쓰는 세계에서 제일 강하고 유족한 나라가 기껏해야 10억 달러(1조 2천 만원)의 국방비를 쓰는 가난에 찌든 나라에 대해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분노케 하는 것은 이 같은 야만적 공격이 가장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펼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란과 쿠웨이트와위 침략전쟁. 백성들을 가난과 무지로 몰아 넣는
후세인이나 김정일 그리고 부시
후세인이나 김정일이는 말할 필요가 없고. 부시만 말하겠습다
잘못된 독선적인 신앙의 특징.
첫째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구분해서 판단합니다.
매사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고 대번에 해석하고 신속히 행동하게 됩니다.
둘째가 더 심각한 문제인데.....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갈라놓고 나서
자기는 항상 선이고 상대방은 항상 악이라고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의 필연적 결과로써,
악의 축인 상대방을 박살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그것도 초전에 박살을 내야 합니다.
충격과 공포로.........
넷째로, 자신들이 설정해 논 선과 악 두 그 밖에 있는 사람들과 집단을 다 불순하거나 비겁한 존재로 낙인찍습니다. 자기와 가까웠던 집단들이 자기편에 들지 않을 때 가차없이 그들을 적인 양 정죄하는 것도 서슴치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걸려 있는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을 적으로 몰아 악마화하는 증오의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은‘아빠’하나님이였습니다. 당시 아람어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다정하게 부를 때 아빠(abba)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듯 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인자한 아빠처럼 다가 왔지요.
그의 유명한 탕자비유에 나오는 아빠처럼 말입니다.
그 아빠는 정말 엄마같은
아빠지요.
자기 유산의 몫을 챙겨 도시로 나간 탕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 사랑의 어버이, 바로 그 아빠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었고,
바로 예수님 자신이였습니다.
거기에는 와 간의 적대적 거리가 없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받아 잘못 낭비한 탕자와 아빠간에도 사랑의 소통이
너무나 아름답게 원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곧 닥쳐올 환난과 전쟁을 예감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로 호소를 했습니다(마태 23:37-38).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가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폭격하는 독수리가 아니라,
폭격 당하는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품어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암탉이였습니다. 암탉같은 하나님이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독사의 자식들」「너희 아비 마귀」
라고도 하셨고, 어떤 사람들을 향하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도 하셨다
상을 뒤엎어버리고 채찍으로 짐승들을 다 흩어버리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다
저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하듯 싸우지는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악마화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악마로 정죄하기는 커녕,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원수라하더라도 악마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원수를 무조건 악마로 정죄하는 그 마음이 악마적이라 하겠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도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듯이,
나의 적도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습니다.
내 속의 악과 적의 악이 서로 도와 그 악마적 힘을 증폭시키게 되면
충돌이 불가피하지요.
그 증폭은 상대방의 악마화에서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명령은 결코 악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 속에 있는 선을 키워주면서 내 속에 있는 선도 함께 키워야 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내 속에 있는 악을 모두 무기력하게 만들어
마침내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서로 자라게 하는 힘,
바로 그것을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설령 백보 양보하며 상대방을 악이라고 합시다.
이 경우에도 성경은 악을 이겨내야 하되 반드시 선으로 이기라고 했습니다
(로마 12:21).
악하다고 규정된 적을 악한 방법으로 이길 수 없음을 말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적을 향해 칼로 대항했던
베드로에게 직접 현장에서 깨우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따른다는 크리스천들이 온갖 세속적 무기를 다 동원해서
그들의 적들을 섬멸하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요.
그들 스스로가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아님을 증명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칼쓰기, 총쓰기, 온갖 무기쓰기는 예수의 삶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간 미국이 개발해온 모든 신무기들을
이라크 땅에서 실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부시의 전쟁실험으로 억울하게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을 그의
날개로 품고 보호하려는
암탉의 모습이 아닐까요
예수님 33세
맹의순 27 스데반 집사님도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순교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나그네요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이요
진짜 생명은 천국에 있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70살 80살 먹을 때까지 사셨다면
예수님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천국 소망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소망은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영혼은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59절)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드린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산 것입니다.
히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겁을 먹고 망나니가 자신없이 칼을 쳐서 몸이 끊어지지 않아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살아서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스데반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산 자입니다.
증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며,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웃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사랑하는 맘 변치 못해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순교자는 산자의 신앙을 가졌기에 산자의 행복을 최후로 증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가진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 동생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유소사의 아들이며 정정혜의 오빠,
성 정하상은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 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으로서
그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삶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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