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유 얻었네 4월 06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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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3-04-06 19:42 조회3,4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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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유 얻었네
시편23:1-6
상처 입은 새 한 마리도
잘 치료해서 하늘로 날려보낼 때
치료해서 보낸 사람도 뿌뜻하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새를 볼 때에도 아름답기 그지없듯이
한 가족들이 생사를 걸고 몇 달 혹은 몇 년을 준비하고
자유의 품안에
나아오는 그 발걸음을 볼 때에
본인들은 물론 지켜보는 이들도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TV에서 북한에서 탈북한 가정을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바뀐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서울에 와서 특별히
좋은 일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예 웃음입니다.
다람쥐가 작지만 걱정하고 고민하고 한숨쉬는 다람쥐를 본 일이 없습니다. 참새가
비록 작은 것이지만 걱정하고 고민하고 자살하는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짧게 살아도 참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쁘게 살아가는
생명들을 수없이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형용
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꽃피던
시절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소련 모스크바에 살고 있던 개 한 마리가
불란서 파리까지 왔어요. 그래서 파리 시내에서 불란서 개를 한 마리 만났
습니다. 그래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한 후에, 불란서 개가 소련에서 온
개한테 소련 실정이 어떠냐?
소련에서는 생활이 어떠냐? 이렇게 물었더니
소련 개가 아주 침을 흘리면서 고향 자랑 소련 자랑을 시작합니다.
소련은 사람뿐만 아니라 개에게도 완벽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다 살 곳,
입을 것, 먹을 것,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간다고 자랑을 했어요.
그러니까 불란서 개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이 불란서 파리까지 왔느냐? 그러니까 그건 꼭 한가지 이유 때문에 왔는데
좀 실컷 짖고
싶어서 왔다는 거에요. 실컷 좀 짖어대고 싶어서.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주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사실입니다.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계 2:8-9)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아무리 좋은 음식, 좋은 집 ,높은 지위 보장된 미래가 있어도
사람됨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사람됨의 자존심을 지켜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개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사자나 호랑이가 아무리 왕 같아 보여도
사람이 짐승같이 살수는 없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대 심판관이라고 하는
유명한 명작소설이 있습니다.
Great Inquisitor 라고
하는 소설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다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대 심판관이 여기서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는 그런 내용으로 장면이
전개됩니다.
심판관의 말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인간을 너무 존귀한
존재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인간이란 바로
유치한 아이와 같아서 권위와 기적으로 영도되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들에게 빵을 주었다면
너는 쉽게 성공했을 것이다.
인간은
빵만
쥐어 주면 누구에게나 복종하는데
어째서 복잡하고 어렵게 자유 같은 것을
준다고 하느냐.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그것을 빵과 돈으로 바꾸는 것이
인간이 아니더냐? 자유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도
결국은 그 자유를 발아래
내동댕이 치고 다시
노예로 삼아 달라고 애걸 복걸할 것이 뻔한 일이다"하고 말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빵만 주면 누구에게나
순종한다.
자유를 주었댔자 그
자유 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바로 다시 또 다른
어떤 것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노예성이
있는 구제 불능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셋방살이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니까
한평생 소원이 제발 좀 내 집 쓰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사 안 할 수 있으니까 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찌어찌 해서 집을 하나
마련했어요.
너무 좋아요.
그 때에 그 만족
한 마음은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바로 몇 달 안돼 가지고 집이
왜 이렇게 작아?
남의 집들은 크더만, 이게 요렇게 조그매
가지고 답답해서
살수가 있나.
좀
큰집, 좀
큰집이 있어야 자유롭겠다고 몸부림을 쳐서
또 애써서 큰집을 마련했습니다.
좀 무리하게 하고 나니까 이 젠 집이 커서
좋다,
했더니요 청소하는게
힘들더랍니다.
또 그런가
하면 집이 크다보니까 작은 집 쓰고
사는 친구들 만날 때마다 이거 돈도 없는 사람이 집만 큰 거 가졌다고
하는 거 비난하는 거 같아서
이거 또 따가워요.
마음이 좋지 않아요.
그런가 하면 밖에 나갈 때마다
도둑놈 들어 올까봐, 밤에 잘 때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집이 크니까
강도 들어 올까봐 걱정이 되어 가지고.
심지어는 누가 찾아 올까봐
교회도 못 나가요.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
자 자유는 어디로
갔습니까?
차라리 문단속 안 해도 될 만 큼 살 때가 좋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무한한 가치를 아는 자
돈으로 살고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거기에
사람의 얼굴이 있고
사람의 웃음이 있고 사람의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격---인격이 있는 것.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갈5:1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시죠
"자유하십니까?"
관상을 보니까 자유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유명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야 그리스도인이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이지 않습니다. 남편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자기를 괴롭게 하니까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죽이고 싶어요. 그건 남편에게 매인 자입니다. 그 인생이 남편에게 완전히
매인 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돼요.
자녀가 조금 잘못할 때 그만 죽을 상입니다
조금 가정이 어려우니까 다 망가지고 아예 사람이 못쓰게 되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사니 못사니 하면 그건 돈에 매인 자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로 믿습니다.
건강하고 자유로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
뭘 하면 못삽니까.
세종대왕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못삽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좋은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을 세종대왕이나 나라를 건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동일시하고
얼마나 많은 동상들이 세워지고 돈에다 그 얼굴을 새겨 넣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돈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위인들에게도 매이지 마십시요
남편을 사랑하되 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남편이 조금 늦게 오면 잠도 안 오고 속상하고 왜 매여 삽니까?
그러나 남편이 늦게 오시면 식탁에다 적어 놓아요.
김치는 냉장고에 있음, 나는 먼저 잠, 내일 새벽기도 위해서 자야됨.
적어 놓고 매이지 말라고요. 남편들도 아내에게 매이지 말아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가지 못하고 의존적인 사람들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어떤 부부가 길 잃어버린 어린 사자를 주워서 이 사자를 집안에서 기릅니다.
사랑해 주고 어려서부터 기르니까 강아지가 되더라고요.
사랑해 주고 같이 먹고 자고 하는 거예요. 장난을 하는데 손을 사자의 입에
넣어도 안 무는 거예요. 완전히 친구가 되었어요. 그래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주고 같이 놀고 그러는 거예요.
1년이 지나니까 이 사자가 덩치가 큰 사자가 되는데 그래도 순하기 그지없는
거예요. 그러나 이 부부는 사자를 이렇게 길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자는 사자가 있는 곳으로, 사자가 사자답게 초원을 누비면서 공격을
하고 먹이를 얻고 하는 것이 사자이지 이렇게 사람하고 노는 게
사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건 복실이지
사자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사자를 데리고 아프리카 정글 초원으로 갑니다.
마침 차를 타고 가는데 나무 그늘 밑에 자는 큰 수사자를 만나고 드디어
이 사자를 내려보내는 겁니다. 이 사자가 알아차렸어요. 아 나하고 닮은 것이
있구나 하고 수사자한테 가니까 수사자가 보는 거예요. 그래서 암놈이니까
역시 암놈 노릇을 하는 거예요. 꼬리를 치면서 아이러브유 하고 당장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사자가 냄새를 맡고 금방 아는 거예요.
일절 접근을 안 합니다. 웬일인지 가까이 가고 더 접근을 해서 안기려 해도
이 수사자가 말을 안 들어 주는 거예요. 오히려 물어서 상처만 나고 반은
죽어서 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절룩 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치료를 해서 몇 달만에 또 데리고 나갑니다.
한 번은 나가니 사자 떼들이 누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곳에 가면
어린 사자도 있고 하니 받아 주겠지 하고 집어넣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다가 비슷한 사자끼리 싸움이 붙어서 집에서 살았던 사자가
완전히 반죽음을 당하고 왕따를 당합니다. 거기서도 못 있는 겁니다.
그래서 또 데리고 옵니다. 이 부부는 어떻게 하더라도 야생 사자의 세계에
적응시키기 위한 엄청난 대가 훈련을 치러서라도 어쨌든 보내야 한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자를 집안에서 일년정도야
괜찮지만 더 이상은
사자도 불행한 일이고 사람도 불안한 일이고 제아무리 잘
먹어도 잡아주는
닭고기를 먹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끈질기게 노력을 해서 결국 나중에는 이 사자가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이 물어 뜯기기도 하고 싸움도 하면서 드디어 먹이가
있으면 공격해 가는 이 훈련을 거쳐서 드디어 가서 나중에 차를 타고 가서 보면 공격하는 것이 보이고 그 사자들 세계에 들어가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끝이 납니다
.
여러분, 집안에 있는 사자는 싸움도 없어요.
집안에
있는 사자는 걱정도 없어요. 먹는 걱정, 먹이 걱정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그건 사자가 아니에요. 그건 강아지예요.
사자는 자유로운 초원으로 가서 넓은 들에서 사자와 같이 있어야 사자고
사자의 일을 해야 사자예요. 힘있게 더 빠른
스피드와 거칠은 야성을 가지고
나아가서 먹이를 취해야 이것이 사자예요.
사자도 그렇거니와 하물며 사람이.........
안락하고 부요하고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난공불략의 요새같은 둥지에서
온갖 단 물만 빨아 먹고 산다고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주제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고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쳐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잘못된 것이 많아서 아픔을 가지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격이 있고 참된 자유에의 갈망이 있는 것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는 무책임, 무질서, 무도덕의 성향으로 자기 맘대로
자기
기분대로 자기 성질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것처럼
곡해되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근본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 안에서 , 은혜 안에서 자유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원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출발점 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고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다.
이것이 우리가 자유의 출발점 이에요.
죄사함→
죄 씻음 → 성령충만 말씀 은혜 충만
우리가 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내가 예수 믿고 자유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자유인답게 정말 자유하게 살고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 대답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왜 늘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途上(도상)위에 實存(실존)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을 깨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ex.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을 성경이 묘사할 때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니
그가 아직도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또 얼굴에는 수건이 싸 매여진 상태로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장례식을 할 때 이 사람을 꽁꽁
결박했던 그런 그 베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 사람을 결박한 상태대로 지금
나오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순간, 이순간 나사로의 모습은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 그림이?
네, 새로운 생명을 얻고 나오지만 아직도 나사로는 결박되어 있었어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그때 비로소 나사로는 완전히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포하기까지 나사로는 아직도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만 여전히 베줄을 맨 결박된 상태 속에 있었던 모습이 이 땅에서 우리 모습.
가난한 사람과 부자
/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사장과 수위 /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여서 잘사는 사람도 있지만
부자여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해서 못사는 사람도 있지만
가난해도 잘사는 사람 있어요
중요한 것은
가난해도 잘살고 부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요
자유로운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사실 이 고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 도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로다.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실 것이로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아들이 반역을 하고 아들의 반역 때문에 아버지 다윗이 쫓겨 다녔을 때
이것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만약 다윗이 정말 아들의 반역을 경험하고 아들에게 쫓겨 다니는
참담한 그
상황 속에서 시편23편을 기록했다면 이 사람은 정말 굉장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도저히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상관없이 환경과 상관없이
다윗은 정말 자유할 수가 있었던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불청객이 여러분 곁을 다가와서 속삭이는 이런 음성을 동시에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웃기지 마라, 너 돈도 필요 하잖아 돈,
그리고 넌 좋은 직장도 필요하고 그리고 네 자식도 문제가 많찮아. 네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은지 알아? 웃기지 마라"
부족함이 없다고 그런
구름잡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을래?
그 불청객 왓어요?
만약 우리가 이 음성을 듣고 마귀에게 동의를 하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과 저는 소위 욕망의 포로가 돼요.
"그래 난 아직도 더 많이 소유해야 해" 그래서 소유의 길을 향해서 우리가
달려가는 그 욕망의 포로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인간이 한 생애를 살면서 탐내야 할 복이 많이 있어요.
그 중에 제일 탐내야 할 복은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주여! 내 가는 길을 인도 하시옵소서. 내 갈 길을 인도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인도를 느끼세요. 하나님의 인도를 감지하세요.
하나님의 인도에 감격해 보세요!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하세요.
에벤에셀 과거에 대해서 매이지 마세요 여기까지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 이레 앞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십니다
ex.
여러분,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엄마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잠들어 있다거나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거의 없습니다. 엄마가 몇 살인지 몰라요. 엄마의 고향이 어디인지,
공부를 얼마나 하신 분인지 그것도 몰라요. 또 어떤 집에 사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재산이 얼마인지 그것도 모릅니다.
고향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라요.
다만 자신을 그렇게 아름답게 깨끗하게 대해주고 있는 그 사랑!
사랑의 관계만을 그 눈으로 피부로 느끼고 확신하고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그 품에 의지하고 그 품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일까요?
어린아이와 어머니와 똑 같은 관계예요.
우리는 사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듯,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형성이 필요할 뿐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모든 삶의 비극이나 모든 삶의 고통이나 모든 삶의 고난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기도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하나님과의 석연치 않은 관계,
하나님과의 어설픈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눈을 뜨세요. 강력한 내 아버지와의 관계,
내 생명의 관계에 눈을 뜨세요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네 낳은 부모는 너를 버려도 나 하나님은 너를 결코 버리지 아니 하리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감동을 힘입고,
거짓으로 감추기 위해서 스스로 파놓은 자기 안전의 조작의 그 무덤들을
파헤치세요. 가면도, 가식도, 허위도, 조작도, 다 끊어 버리세요.
인간은 살다 보면 어느 날인가 삶의 보다 깊은 밑바닥을 꿰뚫어 보는
그런 지혜와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이 그 시간이에요. 이 날이 그 날이에요.
이 장소가 그 장소입니다.
삶의 보다 깊은 밑바닥을 마지막 그 실체를 꿰뚫어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를 알게 되면 이제는 자유하기 시작한 거여요
→ 롬8:37
사실 이 세상에 대단한 것 중요한 것 아무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 이것 밖에는 건질 것이 없는 거여요.
나머지는 전부다 사실
불에 탈 지푸라기 같은 것이고
불타 없어질 것들이요
그걸 붙잡으려고 그 난리를 피워요
저는 부자의 교만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음도 좋아하지만
가난한 자도 가난에 눌리지 않고 넉넉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을 보여주고 싶고 가난한 자들도 힘을 얻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요 목사님이라고 이것이 저의 사명
ex1. 사단장님이 30분 일찍 나와서 주보 나눠주고 인사하고요
그 군부대 교회는 그냔 신나는 거예요
목사님의 일은
일등병하고 사단장님하고 같이 그 일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슨 계급, 무슨 나이, 누가 배웠고 누가 부자고
누가 높은 사람이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8-12)
사방으로 우겨 쌈.
답답한 일을 당함.
핍박을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죽음에 넘기 움.
이와 같은 것들이 본문의 삶의 현장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에 눌리지 않고
은혜와 긍휼의 넘침이 있습니다.
♬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네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주가 항상 계셔 내 맘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셔 위로 위로 하시네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눌리지 않고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까지 받아도
까딱하지 아니하고 벌떡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는 까닭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세상은
강하고 부한 자들을 교만하게 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눌리고 비굴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부한 자들을 겸손하고 따뜻하게 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도 소망으로, 삶의 의욕으로 용기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넘치는 은혜를
곤고함 속에서도 넉넉함과 관용과
너그러움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살다보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약해 질 수도 있습니다.
낮아 질 수도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해도 부하게, 약해도 강하게, 낮아도 높게
사는 축복을 주십니다. 실패속에서도 성공으로 가는길을 여러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낮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은혜롭고 넉넉할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며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저주
대신 오히려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광주 은진 교회에
강하고 부하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 광주 은진 교회에서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됨으로 겸손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광주 은진 교회에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 된 자들이 많이 출석하실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광주 은진교회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때문에 별것 아닌 세상의 것에
대하여
눌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작아지거나 위축되지 않고,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축복하며 노래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바다같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출렁거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
미국에 대 경제공황이 찾아왔을 때 당시에 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통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 순간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움
하나뿐입니다. 두려움을 제외하고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제공황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에 두려움이 두려움의 대상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
또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그 문제 그 자체라기 보다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려움이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한번 두려움의 늪 속에 빠져
두려워 하게 되면
이 두려움이란 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감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의지, 우리의 판단력을 다 마비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 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서 버리게 돼요.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것을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며 불을 지르고
자신이 못사는 것이 다 세상 때문이라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자신의 분노를
쏟아 버리는 그 연약한 사람들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교인들 교회
수많은 상처들을 치료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아픈고 상처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면서 더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
그런 능력이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이 되고,
가난 때문에 못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고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잃어버렸다 찾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천만 마리의 참새보다 더 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값으로 구원 받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아는 삶들이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해방시키옵소서
존경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사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옵소서
모멸 받는 두려움으로부터
경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질책 당하는 고통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난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우스꽝스러워 지려는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도
나를 해방 시키시옵소서.
오 주여 우리의 마음도 당신처럼 되게 하소서.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사랑 받게 하소서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존경받게 하소서.
나는 젖혀두고 다른 사람이 더 선택받게 하시고,
모든 일에서 나보다 다른 사람을 택하여 주시고,
내가 성스러워지려고 하는 것만큼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성스럽게 하옵소서
나를 자유하게 하시옵소서.
나는 하나님 당신 한 분으로도 이미 차고 넘칩니다
골 2:9-12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예수님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요 1:16
우리가 다 예수님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 결박 푸셨도다" 우리 함께 같이 찬양하시겠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 해
소리 높여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할렐루야 나는 자유 해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나는 자유 해
찬양하리 영원토록 찬양하리 영원토록
찬양하리 영원토록 나는 자유 해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주 말씀하시길 쇠사슬 끊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할렐루야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라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이마당에
성인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죄인이지요
누가 나더러 무슨 죄지었다 하면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거짓말
도둑질
살인
간음
부모를 거역
죄인 무슨 명예가 있어요
다 사실이잖아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세상의 판단이 사실은 우리를 많이 속입니다.
이 사회적 거울이라고 하는데 속으면 안돼요.
왜 이렇게 되느냐? 세대 차이다
왜 이렇게 되느냐? 정체성의 위기다. 다 거짓말입니다.
일리는 있어도 진리는 아니에요.
사람의 심령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인생의 기본 욕구는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15살을 먹었건 70을 먹었건 그 인간의
기본 심령의 요구는 같아요.
사랑 받고 싶어하고 기쁘게 살고 싶어하고 자유스럽게 살고 싶어하고
누군가 어디서부터 삶의 의욕이 오기를 원하고
소속감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같아요.
나라가 틀리고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성이 달라도 인간은 인간이에요!
여러 가지 모든 황경과 조건이 달라도 사람은 사람이여요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가져도,
여러분! 돈! 돈! 하는데 돈 가지면 돌 수는 있어도
절대로 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우리의 공통의 유산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 절대자를 위한 관계!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져버리는데서 지불해야 할
피할 수 없는 대가들,
이런 것들때문에 우리가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인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여요
그런데 하나님 자리에 있을려고 하니 그것이 영맞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허약한 관계,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오는 인간의 허망한 심령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알아요?
황폐한 심령 속에 열등감이 일어납니다.
심령이 황폐해지면 불안감이 일어납니다. 불안합니다.
심령이 황폐해지면 부적절해요.
집에서는 괜찮은데 직장에 가서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도 있어요.
직장에서는 괜찮다 해도 집에서 아무 쓸모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어딜 가도 진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마음에 죄책감이 일어납니다. 좌절합니다. 적대감이 일어납니다.
괜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입을 열어 판단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정죄의식이 일어납니다. 우울증에 빠집니다.
순간순간 깊은 우울증에 자기가 소스라쳐요. 「아! 이것이 아닌데...」
생태계는 하나님의 인생의 생명의 원칙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인간들은 생명의 원칙들을 다 인간의 조작으로 바꾸어 버렸지만
생태계는 아직도 살아 있어요.
요 잎들, 꽃들, 강합니까? 약합니까? 혼란이 오지요? 이 나약한 잎, 나약한 꽃들! 생태계는 거짓 신분증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아요. 생태계는 이등도 없습니다.
여러분! 위엣것이 1등이고 옆의 것이 2등이고 밑에 것이 3등입니까?
하나님은 1,2등을 만든 적이 없어요. 인간의 사회적 가치가 가진 자,
못 가진 자. 배운 자, 안 배운 자, 하면서 1,2등을 만들었을 뿐이에요.
나는 하나님 안에서 다 1등이다! 위에 있어도 아래에 있어도 옆에 있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 거기에다 아름답게 자기 위치의
자기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좌절감 자기 콤플렉스, 자기 열등의식에서
벌떡 일어나야 돼요.
누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누가 많이 배웠기 때문에...
그게 아닙니다.
그게 생명이 아니란말이예요
그게 인생의 주제가 아니란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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