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4.20 부활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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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3-04-21 14:56 조회3,4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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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16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들
상구보리는 안하고 하와 중생한다고
떠들고 다니고 사업구상에 바쁜 중들
포교원을 어디다 짓고 불교 유치원 불교 성가단 신도회 조직........
부활절 잔치나 행사 이벤트 여기에는 막 떠드는데
부활 그것이 무엇이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는 별관심이 없는 교인들
신앙의 시금석으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늘 기준으로 삼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 이 두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보화를 발견한 기쁨
그 보화가 천국이어야 하고 그 천국의 근거는 부활입니다
2. 빨리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동
자기 인생을 기쁘게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자기 인생의 궁극적 목표와 의미가 자신과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 있는가?
그래서 오늘
부활이 우리 신앙생활에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말씀드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잇습니다
ex.1
어느 목사님의 고백
목회를 하다가 보면은
이따 금씩 교인들로부터 새신자들을 소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님, 이분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세요.
이분들이 한 번 제대로 믿기만 한다면,
아주 큰 일을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탁을 종종 받습니다. 이건 나쁜 부탁은 아니지만, 흔히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의 숨어 있는, 밑바탕에 깔려있는 세속적인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대부분 이런 큰일을 할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은 재력이 있다든지,
아니면 세상적인 지위가 있든지 아니면 무슨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재력이나 지위나 실력 앞에는
꼼짝 못하시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 하실 수밖에 없다는
우리들의 생각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순진해서 정말 그렇구나 라고 믿고,
그런 분들에게 시간들도 내고, 관심도 갖고 그랬지만,
그런 분들이 그렇게
큰 일을 하 는 경우가 별로 없더라구요.
저도 조금 성숙한 후부터는 그런 부탁을 받으면, 아, 그러십니까? 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에게 평범하게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쓰시는 분은 누구인가?
라고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매우 평범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굉장한 사람들이 있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어떤 일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비범한 역사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링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하신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보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 중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을 보면,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외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자신의 영혼으로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비범하고 대단한 사람도
결국은 역사의 쓰레기통속으로 넣어지는 것입니다
뉴튼이 한 번은
거울에 비친 태양을 계속 바라보다가 눈이 실명할 뻔 했습니다
시력을 회복하려고 사흘간을 캄캄한데서 지냈다고 합니다
태양도 똑바로 오래 쳐다보지 못하는 인간이...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두려움 없이
본다고 달려드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황당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단다.
얼마나 아프셨을 까...........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최소한 그렇게까지는 안하셔도 되는데....
ex2.
인디아나 주 출신의 미국의 대법관으로 있었던,
윌리엄 본 트레이저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 트래이저. 이 분은 비교적 늦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여러 건의 죄질이 질이 나쁜 강도질을 저질렀던 헤리 팔머라는 사람을
마지막 대법정에서 심의를 하고 다루는 책임을 판사로서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도 또한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그리수도를 영접하게 되었어요.
같은 크리스찬으로서 본 트레이져 판사는
이
팔머라는 사람의 회심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람이 정말 변했구나. 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판사로서
공인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그는 깊이 고민했습니다.
정상적인 판결에 의하면 적어도 한10년 쯤을 언도하는 것이 정상적인
언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합니다. 10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이 사람을 교도하기는 커녕 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어떤 중대한 결단을 합니다.
심지어 그는 금식기도까지 하고 나서 마지막 언도를 내릴 때 1 년, 그리고
몇 년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파격적인 것이어서,
법원쪽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판결이다는 여론이
들끌어 올랐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코너에 몰렸고, 어떤 법적인 제재를 받기 위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본
트레이저 판사는 주저하지 않았고,
그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고, 그는 사표를
냈습니다.
대법관의 자리를 미련 없이 그는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그가 언도를 내렸던 헤리 팔머가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오던 그 날
그는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가 교도소를 걸어나올 때, 트레이저는 팔머라는 죄수를 끌어 안았습니다.
죄수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본 트레이져 판사앞에 엎드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시면 안되는데.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시면 안되는데.
그때 본 트레이져는 그를 향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 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 요.
그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일어나서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사는 정말 변화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 것이 바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 때문에 죽으신 그 희생적인 사랑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자기 영혼에서 체험하는 사람들이 은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
다음으로 예수님의 부활도 사람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요
신비입니다
한 독실한 크리스챤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끝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있는 불모의 땅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갔습니다.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볕을 쪼이며 숨이 컥컥 막히는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면서 같은 직 장에 있는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회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 회교의 큰 자랑감은 우리나라 메카에 있는 모하멧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멧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크리스챤은 대답하기를
"그렇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회교의 차이점이다. 모하멧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고
하였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이 아니요 아예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잔인한 로마병정과 간악한 유대인에 의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이 철통같이 지켰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시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보여진 사실이었습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고,
또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이라도 변치 않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데,
부활에 대해서 신약성경에는 204회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는 50억 인류가운데 그 3분의 1 이상이 부활을 믿고
있으며, 50억
인류의 대부분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일요일)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으니(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여러 차례 자세히 확인하여
예고하셨습니다.
일찌기 소크라테스(Socrates)는 사약을 마시면서도 자기가 주장한 진리가
옳은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믿었지만 죽은 다음에 몸이 살아
나리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백이숙제도 수양산에서 굶어죽을 때 그의 정결한 정신이 백세청풍과
함께 영원히 남아 있을 줄은 믿었지만 그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에 찔리고 못박혀 갈기갈기 찢긴 그 몸이 죽은 다음에
다시 살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리라 믿은
것도 아니요, 에녹과 같이 산채로 하늘로 올라갈 것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 무덤에 묻혔다가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던것입니다.
또한 육체의 부활일지라도 막연하게 몇백년 혹은 몇천년후에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리라고 약속하시고 그 일을 이루셨던것입니다.
부활의 신비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요한 일서 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예수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빌리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베드로 후서 3:10-14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요한 계시록 21:4-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스탠버그 의 십자가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 이 그려지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가 일화로 전해지고 있어서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스탠버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성 베드로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는 성당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조심스럽게 그려갑니다만은 얼마동안
그리다가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값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림 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그는 다른 그림을 또 그렸습니다.
집시 페피타라고 하는 모델을 놓고 그는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누드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쉬게 될 때, 이 모델 페피타 라고 하는 여인이, 초안만 만들어놓고
완성하지 않은 그림 을 보면서
"저 그림은 무엇이 에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이군요."
"그렇습니다."
"무슨 사연입니까?"
교회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한 집시여인의 질문입니다.
좀 귀찮지만 설명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통속적인 성경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오셨고 이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고 착한 일 많이 하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이 페피타는 그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퍼합니다. 너무너무
슬퍼하니까
화가인 스탠버그는 그 우는 집시여인을 위로 할 마음으로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셨으니까 울지 마세요." 그랬더니 눈을 번뜩 뜨면서
"정말로 부활 하셨습니까?"
이 여인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에요.
그렇게 기쁜 낯을 하는 것이에요. 이걸 보는 순간 스탠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인에게 예수는 만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 생명력을 얻는데
내가 정말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있느냐? 정말 내가 부활했다고 말했는데
내가 정말 믿는 것인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았 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다시 부활신앙을 부활시켰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을 그리면서 돈 적게 준다고
흥정을 하고 있어? 이 나쁜놈아..... 자기 마음에 가책을 느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하고
부활신앙을 부활시켜서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탠버그의 십자가 이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 특별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이것은 신비입 니다.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입니다.
신비라는 것이 뭐냐하면 사실은 사실이로되
우리의 지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가 없을 때 그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또 때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대로
알거나 모르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내가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안 믿는다고 사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되겠습 니까? 내가 모른다고 해서 있는 사실이 없는 사실로 되겠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로
존재합니다. 엄연히 존재합니다. 보세요
이해 못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느냐? 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예수께서 왜 죽으신 것입니까?
초대교회 사람들 특별히 빌라도까지도 그 당시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해할 것도 같고,
어떤 때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 보세요 병자를 고쳤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오천명을 먹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 능력 많으신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 합니까? 십자가 밑에서 소리지르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
그러나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 많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
능력을 나타내시지
아니하시고 침묵하고 조용히 그리고 비참하게
무능한 자처럼 죄인처럼 죽어갔느냐는 것입니까?
이 십자가 사건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때로 우리는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합니다. 주고 싶은 것도 못 줍니다.
몰라서 우리는 어리석어 지지만
예수께서는 능력도 계시고 할 수 있는데
왜 안 했을까요? 오늘도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러나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예수께서는 많은 능력을
가지신 분인데 왜 십자가에 죽으셨느냐? 는 겁니다. 그것이 신비요.
또 하나는
그렇게도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께서 어떻게 부활했느냐?는 것입니다.
죽으시는 것은 뭐고 다시 살으시는 것은 또 뭡니까?
부활의 신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볼 것
같으면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다고 하는데 만나 보았기에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봤다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유독히 도마는
아니라고 합니다.
"아니에요..."
아주 고집도 셉니다. 모두가 다 예수를 만나 보았다 해도
"아니에요. 나는 눈으로 보아서는 못 믿겠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못 자국이 있는 그 손을 내가 만져 보고야
믿겠노라. 눈으로는 못 믿겠다.
왜 그것은 환상일 수도 있으니까..."
고집을 부립니다. 그럴 것입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났다니
도대체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여기에 두 번째 신비가 있고요.
세 번째 숨겨진 신비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나 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가 부활 하셔서 자기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 이면서 "자, 믿는 자가 되라.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는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선생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확실하게 만나 보고 믿게 됐는데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까?
그 예수를 버리고.. 이 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 놀라운, 신비로운 사건이 눈앞에 있는데 특별히 성경 얘기를 보면은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 라."
그러니까 그 다음 사람들도
"나도! 나도! 나도! 나 도!...."
일곱 사람이 따라갑니다. 따라가는 모습을 가만 히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입니까?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만나 보았습니다.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 점이 납득이 안가요.
부활 사실을 보았어도 부활이 얼마나 엄청난 우주적 대 드라마의
시작인 것을 모르는 거요
그냥 예수님 부활인거여요 내부활이요
새 하늘과 새땅 천국의 시작을 보지 못한 겁니다
"그는 첫 열매 가 되셨다."
첫 번째 아담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 되었다가 바로 그 말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면서 알게 됩니다
또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옛날 직업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이 다시 생각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 사람이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의 증인이란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증거하려면
내가 아깝지 않게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선을 훌 쩍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순교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의 증인입니다.
자,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신비를 한평생 풀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부활절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이라고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부활절과 오순절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절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고,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속,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을 생각한다면
이건 단순한 신비주의 운동에 불과합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주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성주의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인정하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합쳐질 때 이것을 부활신앙이 라고 합니다.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확실한 부활 신앙으로 부활 될 때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 아닙니까?
아주 초라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지요. 부끄러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용기를 내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서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기 저기 이 사실을 증거해줍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전도생활에 3년 동안 같이 합니다.
모르는 것도 많고, 모르는 얘기가 많았겠지요.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고..
여하튼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생활을 같이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서 이러한 사람들로 키워낸 것입니다.
거기서 신앙적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것이에요. 그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 3년 동안 함께 했다는 것!
그 다음에는 부활사건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됐다는 겁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다 믿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감격,
그 사건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알게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난 것인지........
베드로의 편지가 증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결론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초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중심이 잡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나아갈 목표가 뚜렸해집니다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개같이 짐승같이는 살수없다
손할례당을 삼가라 ...........무슨 모양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영으로 살고 섬기며 살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예수님 외에는 할 말이(자랑이) 없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세상 자랑 다 버렸다
7절 예수 그리스도와 코드가 안맞으면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같이 버렸다
9절
이제 내가 구하고 차고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의 그 영광,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구체적으로 뭐냐하면
10절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부활 속에 구원의 실체가 있습니다
부활 속에 천국이 있습니다
부활 속에 우리의 소망이
꿈이 미래가 있습니다
부활 속에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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