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에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의 가르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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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1-06-27 21:14 조회3,9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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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의 가르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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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가르침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① 기독교에 의한 이교 세계의 가치관의 변혁 ⇒ 세상을 본받지 않고
② 인간의 탐심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
③ 물질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물질과 부의 목표이신 하나님
④ 자기 자신을 불쌍한 이들과 동일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과 나눔
2) 삼가 탐심을 물리쳐라.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탐욕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탐욕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었고,
인간의 연대성과 공동체성을 부인하는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다케>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 가난한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고통받지 않는 자들, 부자의 옹호자들, 빈자들을 불법으로 판단하는 자들을 꾸짖었다.(Didache 1.5.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재산축적에 몰두해 있는 사람을 타인을 망각한 비정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자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부요하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리고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재물에 대한 애착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재물의 상실을 ‘기꺼이’ 견뎌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재물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낯설고 잠시뿐인 세상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성자는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시고 사랑의 새 계약을 남기고 가셨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때에 인색해질 수가 없으며,
우리와는 낯설고 잠시뿐인 세상 소유물에 애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부자의 구원 중에서
3세기 중엽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c. 200-258)은 터툴리안이나
후대의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의 합법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대부호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들은 임야에 임야를 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농지를 무한정 확장하며, 엄청난 양의 금은과 돈을 계획적으로 만든 보관소나 지하창고에 쌓아 놓습니다. 그들은 강도가 약탈하지 않을까, 살인자가 공격해오지 않을까,
고의로 소송을 걸어 자기들을 애먹이지 않을까, 더 부유한 이웃의 질투가 적대감으로 변하지 않을까 등의 막연한 근심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도록 괴롭습니다. 그들에게는 종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교통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주지 않고
오직 나쁘게만 사용하는 그런 물건들을 재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To Donatus 12)
키프리안은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외면한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도 비판하였다:
“여러 해 평화가 계속되는 바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활 방식이 소홀해졌다... 모두가 다 제 재산 늘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주교(감독)의 신심도 간 데 없고, 성직자의 충실한 모습도 간 곳 없으며, 곤궁한 이들을
돕던 관대한 동정도 사라졌고 우리 행동의 규율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도 많은 감독이 ..백성을 버렸으며 다른
구역의 시장으로 싸돌아다니며 이윤이 남을 장사나 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형제들이 굶주리는데 감독들은 돈을 무진장
긁어 모으려했고 협잡으로 토지를 손에 넣고 고리대금으로 이윤을 벌어들였다”(The Lapsed 5-6)
키프리안이 볼 때, 박해 중에 부자들은 ‘상속재산’ 때문에 배교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그들의 배교 이유를 진술하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을 기만한 원흉은 세습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재산이 그들을 사슬로 묶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The Lapsed 10)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소유물을 아끼는 부자들은 -복음서의 나오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행적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했다(On Works and Almsgiving 15).
그는 탐욕과 인색을 일종의 예속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갈라디아서 설교에서 부자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실상은 탐욕의 무겁고도 가혹한 멍에를 메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긍휼(자비)의 마음이 신자의 생활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한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다소 문자적으로 주석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자선행위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루어놓은
공동 기금에 의존하여 자신들을 포함한 공동체를 지원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문자적-역사적 주석으로부터 도덕적
권고로 나아갔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보다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부자보다 가난한 자가 더 행복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3) 하나님은 물질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물질과 부의 목표이시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339-397)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만인이 골고루 먹을 음식을 내도록 만사를 안배하셨고 이 땅이 모두의 공동 소유가 되게 안배하셨다.
그러므로 대자연은 만인에게 공통된 권리를 내셨다. 그러나 탐욕이 그것을 소수의 권리로 만들고 말았다”
암브로시우스는 빈자와 부자의 문제를 다룬 소책자 <나봇>을 냈다.
그는 구약성경의 고사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나봇의 이야기는 비록 옛날 이야기지만 두고두고 적용할 수 있다... 아합이란 옛적에 태어난 한 사람만은 아니다.
슬프게도 매일같이 아합들이 태어나고 있으며 절대로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가 죽으면 그대신 여럿이 생겨나고
그래서 아직도 수탈 하는 자들이 수탈당하는 자들보다 수가 많다. 그리고 나봇도 옛적에 맞아죽은 사람이 아니다.
매일같이 나봇들이 몇씩이나 죽음을 당하고 날마다 불쌍한 사람들이 몇씩이나 피살을 당한다”(Naboth 1).
이 소책자는 단순히 부자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인간을 겨냥한 것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나봇의 이야기를 빌려, 부자들이 어디까지나 관리인에 불과하다는 교부들의 사상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자선’을 정의하고 있다: “당신들이 그대들의 소유물에서 빈민에게 희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사실 그들의 몫을 되돌려주는 것뿐이다.”(Naboth 55)
요한 크리소스톰도 세상의 모든 재화는 만인의 공동소유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나누어 쓰지 않은 재물은 일종의 횡령이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은 선하다.
그리고 세상의 재화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골고루 쓰여야 한다.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은 창조주이자 아버지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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