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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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06-12-03 21:25 조회4,1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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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십니다 요20:24-29
그 분은 손님이 아닙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느 독실한 그리스도인 과부의 집에 들어가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부의 신앙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여왕은 이 여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습니까?" 과부는 지체하지 않고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제게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여기에 살고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자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화두를 우리 시대에 던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교수의 저서 "A Life in our Times"라는 책에 보면 그는 자기 집에 고용되어 일하던 가정부 에밀리 윌손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급한 일로 그의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에밀리라는 가정부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백악관이오. 급한 일로 통화할 일이 있으니 갤브레이스 교수를 바꾸시오"이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는 지금 피곤하셔서 낮잠을 자고 계십니다. 지금은 바꾸어 드릴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상기된 음성으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대통령이오. 당장 깨우시오" 에밀리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의 주인은 갤브레이스 교수이고 저는 그분을 위해 일하도록 고용된 사람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나중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겔브레이스 교수를 만나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정부에게 내가 그 여인을 백악관에서 고용하고 싶다고 전해 주시오"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화 가운데서도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 어떤 원칙과 질서 이런 면에서 아주 분명하고 철저한 것이 참 좋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이 관계가 분명하다는 것은 곧 믿음의 바로미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하면 아도나이입니다. ☞.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아도나이)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의 주님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이 시편 16:2절 말씀 속에서 주님이라는 단어의 내용상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73:25-26입니다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두 마음을 품는 자는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증명하는 것.하나님말고는 복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붙잡히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아브라함에게는 요단강 동편 강과 푸른 들판이 복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업, 분깃, 상급이요 방패가 되십니다.욥의 고백입니다. ☞. 욥기19:26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은 시인은 가을 편지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가을이 되면 누구나 감성적인 시인이 되고 고독한 예술가가 된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오솔길을 걸으며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말하는 것을 배우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문장을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한 줄의 문장과 같다. 어린 아이가 연필심을 꼭 눌러 한 줄의 문장을 쓰듯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시공간의 노트에 기록한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생이 자신을 주어로 삼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자신이 주어가 되어 분주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살아간다.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하루살이보다 더 바쁘게 움직인다. 결국 그런 인생은 어느덧 쓸쓸한 가을 낙엽을 밟으며 인생의 겨울을 맞게 된다.그러나 전혀 새로운 인생이 있다. 이 사람은 인생의 문장에서 내가 주어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다. 나라는 주어가 죽고 주님을 주어 삼을 때 주님은 내 자신을 목적어로 삼으신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하나님을 주어로 모시고 내 자신을 목적어로 삼는 인생입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창조와 기적, 생명력 넘치는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모세를 목적어로 삼으실 때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홍해를 가르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창조하여 내었다. 다윗은 주님을 주어로 삼고 역사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또 주님께서 사울을 목적어로 사용하셨을 때 사도 바울이 되어 이방 땅에 교회를 세우고 온 땅 가득 복음을 편만케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착각은 무엇인가? 내가 주어가 되고 하나님이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어가 되어 하나님을 수단 삼고,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딜레마에 빠져 실망하고 좌절한다. 주님을 주어로 삼지 않으면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없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주어로 삼고 내가 목적어가 되자. 단,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주어가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주어 삼고 내가 목적어 된 경험을 한 다음에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헌신할 때는 내가 주어가 되고 세상이 나의 목적어가 된다.오직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주어가 되고 사명을 목적어로 삼는 것이다. 날마다 주님을 주어로 삼는 삶을 살자. 사도 바울이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한 것은 주님을 주어로 삼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오늘 우리 인생의 주어는 누구인가? 주님을 주어 삼으면 나는 그분의 목적어가 된다. 하나님의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되는 인생말입니다.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다.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목적어로 삼는 자가 있는가?
헤롯은 새로 태어난 아기 왕이 언젠가 자기의 왕좌를 빼앗을까봐 두려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철저히 오해했다. 예수님은 헤롯의 왕좌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삶의 주인이 되는 왕이 되기를 원하셨다.예수께서는 헤롯의 현재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영생을 주기 원하셨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오셨다
오늘날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 기쁨을주기 원하시는데도 예수님을 하나의 종교로 믿다보니 예수님과 흥정을 하고거래를 하는 이상한 종교가 되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라 예수님은 당신의 어떤 것도 요구하신 일이 없습니다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인격을 걸고 인생을 걸고인격과 인격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예수님은 나의 대접을 받으시는 손님으로 오시지 않습니다.나의 주님으로 오시기를 원하십니다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실 것입니다.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저에게 넘치도록 그런 믿음을 갖게 하여 주셨습니다.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분은 손님이 아닙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느 독실한 그리스도인 과부의 집에 들어가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부의 신앙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여왕은 이 여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습니까?" 과부는 지체하지 않고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제게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여기에 살고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자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화두를 우리 시대에 던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교수의 저서 "A Life in our Times"라는 책에 보면 그는 자기 집에 고용되어 일하던 가정부 에밀리 윌손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급한 일로 그의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에밀리라는 가정부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백악관이오. 급한 일로 통화할 일이 있으니 갤브레이스 교수를 바꾸시오"이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는 지금 피곤하셔서 낮잠을 자고 계십니다. 지금은 바꾸어 드릴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상기된 음성으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대통령이오. 당장 깨우시오" 에밀리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의 주인은 갤브레이스 교수이고 저는 그분을 위해 일하도록 고용된 사람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나중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겔브레이스 교수를 만나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정부에게 내가 그 여인을 백악관에서 고용하고 싶다고 전해 주시오"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화 가운데서도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 어떤 원칙과 질서 이런 면에서 아주 분명하고 철저한 것이 참 좋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이 관계가 분명하다는 것은 곧 믿음의 바로미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하면 아도나이입니다. ☞.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아도나이)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의 주님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이 시편 16:2절 말씀 속에서 주님이라는 단어의 내용상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73:25-26입니다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두 마음을 품는 자는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증명하는 것.하나님말고는 복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붙잡히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아브라함에게는 요단강 동편 강과 푸른 들판이 복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업, 분깃, 상급이요 방패가 되십니다.욥의 고백입니다. ☞. 욥기19:26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은 시인은 가을 편지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가을이 되면 누구나 감성적인 시인이 되고 고독한 예술가가 된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오솔길을 걸으며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말하는 것을 배우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문장을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한 줄의 문장과 같다. 어린 아이가 연필심을 꼭 눌러 한 줄의 문장을 쓰듯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시공간의 노트에 기록한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생이 자신을 주어로 삼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자신이 주어가 되어 분주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살아간다.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하루살이보다 더 바쁘게 움직인다. 결국 그런 인생은 어느덧 쓸쓸한 가을 낙엽을 밟으며 인생의 겨울을 맞게 된다.그러나 전혀 새로운 인생이 있다. 이 사람은 인생의 문장에서 내가 주어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다. 나라는 주어가 죽고 주님을 주어 삼을 때 주님은 내 자신을 목적어로 삼으신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하나님을 주어로 모시고 내 자신을 목적어로 삼는 인생입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창조와 기적, 생명력 넘치는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모세를 목적어로 삼으실 때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홍해를 가르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창조하여 내었다. 다윗은 주님을 주어로 삼고 역사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또 주님께서 사울을 목적어로 사용하셨을 때 사도 바울이 되어 이방 땅에 교회를 세우고 온 땅 가득 복음을 편만케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착각은 무엇인가? 내가 주어가 되고 하나님이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어가 되어 하나님을 수단 삼고,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딜레마에 빠져 실망하고 좌절한다. 주님을 주어로 삼지 않으면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없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주어로 삼고 내가 목적어가 되자. 단,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주어가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주어 삼고 내가 목적어 된 경험을 한 다음에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헌신할 때는 내가 주어가 되고 세상이 나의 목적어가 된다.오직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주어가 되고 사명을 목적어로 삼는 것이다. 날마다 주님을 주어로 삼는 삶을 살자. 사도 바울이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한 것은 주님을 주어로 삼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오늘 우리 인생의 주어는 누구인가? 주님을 주어 삼으면 나는 그분의 목적어가 된다. 하나님의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되는 인생말입니다.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다.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목적어로 삼는 자가 있는가?
헤롯은 새로 태어난 아기 왕이 언젠가 자기의 왕좌를 빼앗을까봐 두려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철저히 오해했다. 예수님은 헤롯의 왕좌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삶의 주인이 되는 왕이 되기를 원하셨다.예수께서는 헤롯의 현재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영생을 주기 원하셨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오셨다
오늘날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 기쁨을주기 원하시는데도 예수님을 하나의 종교로 믿다보니 예수님과 흥정을 하고거래를 하는 이상한 종교가 되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라 예수님은 당신의 어떤 것도 요구하신 일이 없습니다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인격을 걸고 인생을 걸고인격과 인격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예수님은 나의 대접을 받으시는 손님으로 오시지 않습니다.나의 주님으로 오시기를 원하십니다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실 것입니다.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저에게 넘치도록 그런 믿음을 갖게 하여 주셨습니다.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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