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신앙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준봉 작성일07-01-01 23:36 조회3,128회 댓글0건

본문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                             마24:15-25:13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말고 처음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정절을 지키며 기다리는 여인그 마음하나 지킨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십니다                       
설교자 한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 재림의 교리는 높게 치솟은 산이 풍경 전체를 위압하는 것과 같다」한 작가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당신이 어느 길로 가든지, 어느 통로를 밟고 지나가든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리고 고개를 넘을 때마다 당신의 시야 가득하게 산이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첫 번째로 저를 감동시켰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제가 추구하던 교리가 어느 것이었든 간에 또 제가 주장하던 교훈이 어느 것이었든 간에 이것이 예수님 재림의 소망으로 향하고 그 소망으로 종결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순종과 감사의 모든 길은 그 산으로 이르게 합니다.」신약 성경에는 예수님 재림에 대해서 300번 이상 언급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사실은 명백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이 결정적인 순간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아버지가 딸에게 쓰는 편지형식으로 잘 정리된 글을 소개합니다
매일을 그 날처럼 기다리는 거야
사람들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좋은 곳이라곤 하지. 그러나 실제로는 벌거벗은 영혼이 황량한 사막을 맴도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나 싶어.허공을 맴돌며 찬양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곳 말이야. 그런 이미지는 아주 잘못되었어. 이사야서나 계시록에 소개된 천국은 너무도 아름답고 풍성한 곳이거든. 자연이 창조의 원형대로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온전한 모습으로 발전된 문화가 꽃피는 곳으로 그려져 있어. 이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이야.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있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겐 천국이 언제 어떻게 임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어. 예수님의 답은 이랬어. 천국은 이미(already) "너희 안에 있다." 언뜻 동문서답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야.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이 세상에 임하는 나라이지. 이 나라는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권세와 함께 시작되었어, 그러나 그것은 세상 속에 "그 분의 발판을 세운 것"일 뿐이야. 물론 그가 심판주로 다시 오실 그 날에 완성될 나라이지. 그래서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가르친 거야. 아직은(not yet)당신의 나라가 온전히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그 나라의 권세를 누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 나라를 기다리는 인내와 소망으로 살아가야 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완성될 것을 기다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는 이중구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너무도 중요해.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잘못되고 삶도 왜곡되기 쉬워. 이미 임한 나라만 강조하면 현세적이 되거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이루려는 생각에 자칫 혁명적인 자세를 부추기기 쉬워. 실제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어. 반면에 아직도 기다릴 나라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우에도 내세적이며 비현실적인 신앙이 되기 쉽지. 이 세상은 오로지 대기소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고 말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기에 대해 조바심을 쳤던 것은
옛날 유대인들만이 아니야.예를 들어 1999년 10월에도
재림의 소문은 일반 언론까지도 관심을 가졌을 정도로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어.
그날 어떤 이들은 흰옷을 입고 모여 재림을 기다렸지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다리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하나님 나라가 임할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므로 너무 집착하지 말라 하셨어. 오히려 그 날이 이르기까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 성령이 임하시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종교 개혁자들은 이런 진리에 따라 "내일 재림이 있을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는 것은 중요해. 그것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영원을 향해 열린 안목을 주기 때문이야. 천국 비전은 죽음이 임박해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야. 천국을 바라며 사는 사람은 매일의 삶 속에서 결코 무기력할 수 없지. 비현실적일 수도 없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질 것에 소망을 둔 사람보다 훨씬 힘차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마련이란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는 이런 자세로 오늘을 살아갈 지혜가 담겨 있어. 그 비유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과도기의 특수성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지. 우선 하나님 나라의 과도기적 속성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서 잘 볼 수 있어. 나란히 기록된 이 두 비유는 절묘한 한 쌍이야.
첫째 비유는 아직도 기다려야 할 천국에 관한 것이야. 둘째는 천국 일꾼의 자세에 관한 것이고. 첫째 비유는 더디 오는 천국을 수동적 기다림에 대해 말해. 후자는 이미 주어진 천국을 위해 능동적으로 일하는 자세를 가르쳐주고.
잘 아는 겨자씨의 비유는 작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하는 천국의 역동성을 보여주지. 누룩 비유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으나 큰 영향력을 가진 천국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고. 가루 서 말이면 빵 몇 개를 만들기 위한 적은 반죽이 아니라 굉장히 많아. 거기에 섞어지는 누룩 또는 이스트는 한 숫가락 정도이지만 전체에 퍼져 맛있는 빵을 만들어내지. 이처럼 천국은 맛 없는 이 세상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묘사되고 있어. 숨겨진 보물을 찾은 농부의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전적으로 헌신하게 마련임을 보여줘.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도 마찬가지야.
마지막으로 가라지 비유는 온갖 방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자라 가는 천국을 보여주지.어떤 작가는 하나님이 왜 죄와 악을 방치하고 계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이 비유에서 찾았어. 그는 이 세상을 가라지 같은 사건들과 사고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았어.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시지만 사탄도 줄기차게 훼방하거든.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일거에 처리하지 않으시고 왜 오래 참으시는지를 보여준다는 거야.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지. 오늘 밤 하나님께서 모든 가라지를 뽑으시면 당신은 과연 내일 아침 살아 있을 자신이 있는가.
함께 공부했던 캐나다 대평원 지대의 농장 출신 친구도 이 비유가 사리에 어긋난다고 느꼈어. 농사꾼이 보면 가라지는 빨리 뽑을수록 좋지. 사실 그   정도는 서울 한복판에서 자란 나도 알아. 그러나 이 비유는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거든. 농사를 그렇게 하면 망치지.친구는 예수님께서 목수이셨기에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신 말씀이 아니냐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어. 그 친구 생각처럼 이 비유를 농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이해될 수 없지. 모든 비유가 그렇지만
여기에도 고의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트위스트가 있어. 바로 농업 지식이나 상식에서 볼 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야.이 비유는 결코 농사 이야기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어떤 인내와 사랑을 가지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지. 하나님 나라는 그가 정하신 시간에 그의 방법으로 임할 것이야. 우리는 매일을 그 날처럼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상력이 메마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 특히 민주화나 통일의 꿈에 못 미친 것은 치명적이었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든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고 봐. 아프리카와 동남아의 정글을 헤치며 복음을 전하는 열정은 있었지만 정작 주변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꿈이 약했어. 독재로 인권이 유린되고 경제정의가 시행되지 못하며 환경이 파괴되는 가운데 공의와 샬롬을 향한 비전이 약했던 거지.  이제 그 비전이 회복되어야 할 때야.
그리스도인은 이 비전과 경험 속에서 살아가지. 그들은 비록 세상에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이들은 아니야, 우리는 찬송가 493장의 가사처럼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아가고 있어. 그것은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에서 증명되었지. 그것은 또한 그 뒤를 따른 모든 성도들이 누린 복이었어. 그것이 바로 지금 역사의 끝에 살고 있는 우리가 누리는 복이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빠는 그 힘들고 어려운 때마다 이 소망을 되새겨 본단다. 그러면 곧 기쁨으로 찾아와 이길 힘을 주거든. 네게도 같은 기쁨과 소망이 넘치길 바래.
이제 편지를 마쳐야겠다. 오늘도 우리 가족 모두가, 아니 믿음의 형제자매들 모두가 이 천국 비전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길 기도한다. 너도 엄마와 동생 그리고 아빠,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해 주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