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신앙

골고다에서 맞는 성탄절?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준봉 작성일07-12-22 21:05 조회2,792회 댓글0건

본문

골고다에서 맞는 성탄절?
                                                                         누가복음 23:29-43
전기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주전 600년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입니다. 그는
보석의 하나인 호박을 마찰하면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후 호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엘렉트론에서 일렉트리시티, 전기란 말이 나왔습니다.
탈레스 이후 2,500여 년이 지난 1879년에 발명왕 에디슨은 탄소 전구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8년이 지난 1887년 3월 6일에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 뜰 앞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밝혀졌습니다. 당시에는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전등소에서
7㎾짜리 에디슨 다이나모 발전기 3대로 전기를 만들었는데, 16와트 짜리 전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로 당시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설비였다고 합니다.
그 후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잠시도 전기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전기가 없는 곳이 있었습니다.
온 세상에 전등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그 골짜기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뒤늦게까지 아직 탄생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탄을 체험치 못한 한 사람에 한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강도 이야기입니다.
 
그의 양심은 편안치 못했습니다.  길가는 사람을 가로막고 금품을 빼앗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랑민이 넘쳐나던 당시 상황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떤 비관적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생활 근거지 없이 떠도는
집시 같은 사람이 80%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는 동료들과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이건 우리 탓이 아니야. 우리만 강도냐? 그 놈들은 칼만 안 들었을 뿐,
우리 보다 더 나쁜 강도지. 이들이 증오하는 소위 그 놈들이란
여러 부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로마에 아부하여 돈으로 분봉왕 자리를 사고,
그 밑천을 뽑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뽑아가던 헤롯왕,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 빌라도,
아니 연약한 유대 왕국을 집어먹은 로마 제국,
그 로마에 빌붙어 세금이란 이름으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던 세리들, 강포한 군인들,
성전을 차지하고 앉아 마지막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찾아오는
불쌍한 백성들을 가로막고 서서 거들먹거리는 제사장들,
병든 짐승을 제물용으로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하던 성전의 장사치들,
율법 지식을 자랑하면서 무식한 민중을 무시하던 바리새인들,
이들이 다 강도로 보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나만 강도냐?
그리고 내가 강도가 되고 싶어서 되었나? 나는 시대의 희생양일 뿐이야!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최근에 나타난 아주 특이한 선생님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 선생의 이름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간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갈릴리의 디베랴 바닷가에는 수만 명이 모인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기도 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세리도 친구로 삼으셨고,
심지어 그 제자 중에도 세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이전의 어떤 선생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특출한 분이라고들 했습니다.
 게다가 그 분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고 말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선하고 의로운 선생님은 본 적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그는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 예수 선생님에 대하여 좀 더 알길 원했습니다. 그가 수집한 정보는 이렇습니다.
그 예수 선생은 탄생부터가 특별했다. 그는 약 삼십여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그 날 밤 하늘에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밝은 별이 나타났고, 천사들이 노래를 했다.
그 날 밤 들판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보았고,
목자들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다.
지금도 베들레헴에 가면 그 목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 목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예수 선생님에게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을 직접 만나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았는데,
그가 지금도 베다니 마을에서 여동생들과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최근 소식은 그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그 예수 선생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지금 여리고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분이 여리고를 지나면 이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거칠고 황량한 유대 광야를 무대로
강도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예수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예수를 한 번 만나볼까?
그러나 그로 하여금 예수께로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죄책감이었습니다. 너는 망가진 인생이야.
네 부모가 너를 회당에 데리고 다니면서 율법을 가르칠 때,
강도가 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네 손에는 피가 묻었고,
네 주머니는 희생자들의 돈으로 채워져 있지 않느냐?
네가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 의로운 선생님 앞에 나간단 말이냐?
자신이 죄인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핑계들이었습니다.
넌 이 유명한 산채의 두목이야. 네 목에는 지금 거액의 현상금이 붙어 있어.
너는 졸개들을 먹여 살릴 책임이 있어. 그 예수 선생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닌다고
하는데, 어쩌면 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만약 잡히면 너는 끝장이야.
십자가에서 죽게 될 거야. 네가 호기심 때문에 예수 선생을 만나러 나간다는 것은 위험천만이야
 
그를 예수께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세 번째 이유는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대 변신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강도였지만,
이제 세력을 모아서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로마와 맞서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로마의 고관 대작이나, 군인들은 건드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로마 군인도 털고, 귀족들 주머니도 털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자신들을 강도가 아니라, 로마와 맞서 투쟁하는 독립 투사로 대접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혼자 속삭였습니다.
예수 선생,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고, 당신의 가르침도 들어보고 싶소.
나도 이 강도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요.
어쩌다 보니 인생이 이렇게 비탈에 미끄러지고 만 것 뿐이요.
당신만 왕국이 있는 게 아니요. 내게도 내 왕국이 있소.
내게는 수하들이 있고, 앞으로는 로마와도 맞서볼 계획이요. 우리 한번 내기 해 봅시다.
당신과 내가 나이도 비슷한 것 같으니,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난 내 나라를 세우는 거요. 당신은 당신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결국 그는 예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 선생님이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졸개들에게 명령하여 귀찮게 하지말고 보내 드리라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예전처럼 자기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은 몇 일 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대항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빌라도 총독은 수색대를 파견했습니다.
오합지졸인 그의 수하들은 잘 훈련된 로마군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쫓기다가 체포되어 짐승처럼 예루살렘에 끌려갔습니다.
거반 죽을 정도로 얻어맞은 후, 너무도 당연히 십자가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문난 강도가 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날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이유가 바로 그 예수 선생님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불과 일 주일여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 예수 선생님이
자기와 함께 처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를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 선생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그도 예수 선생님을 보려고 했으나,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 선생님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후였습니다.
 자신 옆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그 분이 매달린 후에야
그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이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린 채로 그 분을 뵙게 되다니.  그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강도로 죽게 된 자신의 인생을 슬퍼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세상을 저주했습니다. 악을 쓰고,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운명하기까지 긴 시간 동안 한 말은 고작 일곱 마디뿐이었습니다.
그 예수 선생님은 심지어는 고통을 줄여주는 신 포도주로 마시길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고통에 헐떡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평화로웠고,
그의 깊은 눈빛 속에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애정이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왕들이 가지는 음흉하고 교만함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선생님의 말에 놀랐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할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원수들을 용서하다니,
이건 강도가 세우려고 했던 나라에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세우고자 했던 나라에는 잔인한 복수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강도가 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게 만든 이 세상에 대한 복수,
부자들에게 대한 복수, 로마 군인들에 대한 복수, 다 죽이고 빼앗아라. 다 뒤집어엎어라.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라. 힘이 정의이다! 이게 그의 나라의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달라 보였습니다. 그의 나라에는 용서가 있었습니다.
용서가 있는 나라라면! 나 같은 강도도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로마법도, 유대법도 나를 용서하지 않고, 이렇게 십자가에 나를 매달았는데,
이 예수의 나라에는 용서의 법이 있다니!
더구나 예수 선생님은 한 젊은이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을 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머니, 이 얼마나 그리운 말이던가! 그는 집을 떠난 이후, 강도로 떠돌게 된 이후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그의 험한 인생에 어머니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독기 어린 그의 눈에 눈물이 배어 나왔습니다.
그의 마음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 어머니 품으로 만족하던, 그 어리고 맑던 시절. 때묻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놀던 그의 손에는 지금 커다란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에는 사랑은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세우려는 나라에는 따뜻한 가정의 사랑 따위는 사치였습니다.그러나 예수 선생님의 나라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었습니다. 돌봄이 있고, 사랑에서 우러나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아, 이 예수 선생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미 내 나라는 다 무너졌건만,
이 예수의 나라는 건재하지 않는가?
강도는 자신의 나라는 힘으로 세우는 나라였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세우는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사랑 앞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모든 체면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그 때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랑하는 내 형제여, 그대가 세상에서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수명이 짧고 허무한 나라였지만,
내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일세. 내가 그 생명의 나라로 그대를 받아들이겠네
왕이신 예수님은 그 날 강도를 당신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날 강도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강도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삼십 삼 년 전에 탄생하셨건만,
강도에게는 그 날이 예수님의 성탄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구원자로, 그의 인생에 탄생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 모친 마리아, 동방박사들, 목사들 보다
삼십 삼 년 늦게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늦깎이 성탄절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언제입니까? 12월 25일입니까? 아닙니다. 성탄절은 우리가 예수님을 인생의 왕으로 영접하는 그 날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성탄절을 맞이했지만,
어떤 이는 아직도 성탄절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직도 성탄절을 맞지 못했나요? 그렇게 된 이유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 때문에 의로운 주님께 못 온다고 합니다. 바쁘고 피곤하다고 핑계합니다.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합니다. 아직은 자신의 나라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이 될 나라를 세우는 데 몰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탄생하셨습니까? 아직 그렇게 못하셨다면 예수님을 영혼에, 가정에, 일터에 구주로, 왕으로 영접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장 12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