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에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의 가르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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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1-06-27 21:13 조회3,6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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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의 가르침 2
클레멘트는
<교사> 2권의 끝에서 그는 금과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상류층 여인들의 욕망을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2백명 가량의 그리스도인 부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주장하였다:
“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용하면 안되나요?
나는 그것을 내 옆에 가지고 있는데, 왜 나는 그것을 즐기면 안되나요?
누구를 위해 이것들이 만들어졌나요?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클레멘트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는 여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는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인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신다.
그리고 필요치 않은 것은 땅 속이나 물 속에 감추신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궁핍에 처해있는데도, 사치스럽게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클레멘트의 서신을 보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일할 수 있으면 모두 일했으며,
기술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술을 가르쳐주어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조합을 통해 돌보았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모두가 이웃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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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부자의 구원>(The Rich Man‘s Salvation)에서 클레멘트는 재물의 적극적인 측면을 언급하였다.
즉, 재물이 올바르게 이해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도구의 기능을 다할 것이다(14.1 이하).
재물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형제를 위해 사용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16.3).
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쓰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소용되는 만큼 써도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가난 그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분으로 남는 것은 곤궁한 사람과 나눠 가져야 한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면 인간 심성이 저속해진다. 하나님은 같이 나누고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인류를 지으셨다.
한 사람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이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부(富)는 교제와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4세기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역설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 감독(c.347-407)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해치는 일이라고 했다:
“가난한 이들이 말없이, 한숨지으며, 눈물 흘리며 물러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에 칼을 꼽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둘 중에 상처를 더 크게 입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임을 알고 있습니까?”(On Matthew: Homily 35, 5)
어거스틴도 이기심과 탐욕을 자기부정과 사랑(caritas)으로 바꾸라고 호소하였다.
“비정한 탐욕을 뿌리 뽑고 사랑을 심으십시오. 비겁한 탐욕이 만악의 근원이듯이
사랑은 만선(萬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Sermon 72. 4)
그는 이기적 쾌락주의를 배척하였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 사랑을 설교하였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금식하고 기도하자’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금식하여 남긴 몫으로 가난한 이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한다면 마땅히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더 주어야 마땅합니다.”(Sermon 10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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