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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빼앗지 않는 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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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3-05-06 13:24 조회2,5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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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빼앗지 않는 채움

*. 좀 길지만 꼭 한번 필독하시면 많은 유익이 될줄로 앎
****** 공부는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한다. 오늘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하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과 우리의 구체적인 결혼생활이 연결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삶 속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자녀로서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이와 관련되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결혼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성경의 입장에 비추어 행복한 결혼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등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만드시고 부부관계를 마치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가정 즉 부부를 통해서 주신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를 자녀와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축소시켜서 말씀한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참 행복한 것 같지만 결혼생활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들여다 보면 냄새나고 깨어지고 보기 흉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특별히 현대 산업사회에서 결혼의 실상은 그 특징이 몇가지로 축소된다. 우리의 주변에도 깨어진 가족들이 매우 많다. 문화적인 이유로 완전히 이혼하지는 않지만. 계속 갈등하면서 살고 또는 그 갈등을 아주 체념하고 사는 부부들이 많다. 결혼이란 그냥 이런 것인가보다 하면서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마치 독신자처럼 외롭게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들도 많다. 일부 비기독교 학자들은 결혼을 필요악 내지 새장의 생활로 비유했다. 새가 새장에 들어갈 때는 희망을 가지고 들어가지만 이내 절망 속에서 다시 빠져 나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결혼제도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치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바로 여기에 결혼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의 목적은 .돕는 배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결혼의 목적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다. 왜 결혼하느냐고 물으면 아주 추상적인 얘기들을 한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겠냐고 물으면 좀더 구체적인 결혼의 목적이 나온다. 대개의 사람들은 돕는 배필보다는 바라는 배필로 “키는 어떻고. 교육은 어떻고. 경제적인 것은 어떻고” 등 전부 바라는 여건들을 내어 놓고 결혼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결혼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왜 결혼하십니까.”

“나는 돕기 위해서 결혼했습니다. 모자라는 나의 남편을 돕기 위해 결혼했고. 남편은 모자라는 저를 돕기 위해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돕는다 (helping) 라는 말을 좀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만들어져 가야 하는데. 그 불완전한 남편은 아내를. 또 아내는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모자라는 점을 수용하고 부족한 면을 채우는 행위가 바로 돕는다는 것이며 이럴 때에 우리가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배필의 의미

배필은 짝(mate)이라는 말인데 여기엔 세가지 기본적인 뜻이 있다.
첫째는 (qua.lity)에 있어서의 동등이다. 가령 손과 손이 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손과 발은 근본적으로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짝이 될 수 없다. 손과 손은 동등하다. 남자와 여자는 누가 낫고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짝으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qua.lity)가 같다.
배필 이란 말에는 위치와 역할이 다르다는 뜻도 있다. 손은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오른손. 왼쪽에 있기 때문에 왼손이며. 위치가 다르며 그 역할도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이 주로 많은 일을 하고 왼손은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또 일부 다른 사람들은 왼손이 주된 일을 하고 오른손이 도와 준다. 아내와 남편도 그 위치와 역할이 다르다. 하는 일이 다르며 처해 있는 위치가 다른 것이다.
또 배필이란 말은 꼭 끼워 맞는다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 맞는 것이 하나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생명력이 생기고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짝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혼을 생각할 때 배필이 되기 위해 결혼한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돕는 배필이 되면 먼저 대하는 태도나 생활하는 자세가 여러가지로 달라진다. 돕는 배필은 서로 모자라는 것을 돕고 살아가는 짝이기 때문에 도와 주는 데에서 보람을 느끼며. 오늘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내일에 기대를 걸고 내일의 결과를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라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 우리가 화초를 하나 길러도 매일 물을 주면서 그 화초가 자라는 것을 볼 때 굉장한 기쁨을 느낀다. 한낱 풀 하나에도 그런데 배우자가 나의 도움으로 매일 매일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기쁨을 돕는 배필로서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라는 배필로 결혼을 하면 바라는 기대와 현실은 큰 간격이 있으므로 결혼하는 그날부터 문제가 생긴다. 바라는 배필로 결혼하면 자신도 불행하고 배우자까지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결혼할 때는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이 문제를 놓고 미리부터 기도하면서 선택해야 한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하나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막10:7-9) .크리스챤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싫으면 그만둘 수 있다는 일반 사람들의 결혼관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 있어도 갈라놓지 못한다. 헤어질 수 없다는 확신이 크리스챤의 결혼생활에는 꼭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짝지어 주셨다는 사실은 엄청난 신비이다. 서로 돕는 배필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어려움을 무난히 넘기고 승리하여 나갈 수 있다. 성격이 틀리다든지 시어머니 때문에라든지. 시누이. 돈 때문이라는 등의 이혼 핑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짝지어 주셨다는 확신만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마음에 안 들 때가 있는데 하물며 어떻게 시어머니나 시누이를 모두 이해하겠는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사람과 자신을 가른다는 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양육체계로 성장해야

하나님은 부부를 양육체계 (nursing system)로 짝지어 주셨다. 부부를 한 체계로 볼 때 아내와 남편은 하부조직 (subsystem)으로서 부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부를 떠난 아내나 남편은 있을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고 아내와 남편으로 한 체계를 이룰 때에야 공동작용 에너지 (synergy)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체계의 특징이다.
또한 체게는 위반행위가 있기 마련이다. 아내가 아무 이유 없이 샐쭉해질 리가 없다. 이것은 그냥 아내의 반응이 아니고 부부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반응이다. 또 이 체계는 살아있기 때문에 항상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건강한 삶에 나타나는 이 변화는 두가지 양상을 띈다. 위축되고 죽어버리든지 또는 성장하고 발전하고 성숙하든지 양쪽의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
또한 체계는 경계가 반드시 있다. 불행한 가정들을 상담해 보면 경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남편은 아무 때나 항상 친구를 데려 오고 아내는 그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안정감을 가지지 못한다. 가정과 부부는 다른 부부가 침범할 수 없는 우리 만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 대가족의 상황에서 시부모와 같이 살더라도 그 안에는 부부로서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체계이다.
양육체계는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휴식을 취하는데 하루 24시간 가운데 거의 20시간은 잠을 잔다. 그것이 바로 휴식을 갖는 것으로서 갓 태어난 아이가 휴식을 갖지 못하면 자라지 못한다. 갓 결혼한 부부일수록 이제 부부라는 새로운 양육체계로 태어나서 계속 양육되는 체계로 자라려면 쉬어야 한다. 쉼이 없이는 자랄 수가 없다. 따라서 밖에서 아무리 어려워도 가정에 와서는 쉼이 있어야 잘 자란다.
또 양육의 가장 쉬운 모델로 어린아이를 보면. 잘 먹어야 한다. 빈 곳을 채워주어야 한다. 아내의 빈 곳을 남편이 채워주고 남편의 빈 곳을 아내가 채워주어야 부부가 양육체계로 잘 자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부를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계속 뺏기만 하거나 또 아내가 남편에게 뺏기만 한다 이렇게 되면.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고 계속 배설만 하기 때문에 자랄 수 없다. 부부가 잘 자라려면 서로 먹여주어야 하고 서로 빈 곳을 채워주어야 한다. 또한 심리적으로도 사랑과 안정. 그리고 정서적인 여러가지 측면을 서로 채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잘 자라려면 안정감 속에서 엄마와의 피부접촉과 표정. 사랑으로써 채워져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피부접촉은 매우 중요하다. 부인이 가정 안정을 느낄 때가 남편이 안아줄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팔 크기를 놀랍게 만드셨다. 두 사람도 안되고 딱 한 사람 만을 안을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또한 아내는 남편을 위해 깔끔함과. 아름다운 마음.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결혼한 부부 가운데 남편이 직장에 다니고 아내는 집안에만 있을 경우 정보의 차단으로 인해 마음이 공허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남편은 밖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아내와 같이 나누면서 채워주어야 잘 자랄 수 있다. 밖에서 한 경험을 같이 나누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양육의 모습이다.
다음에 아이들이 자라다 보면. 경험이 없기 때문에 떨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 처음 결혼 생활에서는 말 한마디에도 배우자끼리 쉽게 상한다. 그렇게 상처받은 것을 치유시켜 주어야 한다. 치유에는 적극적인 치유와 자연 치유가 있다. 가만히 두어도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치유가 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적극적으로 치유해 주어야 할 때가 있다. 가령 어떤 상처가 생겼는데 환경이 오염되어 있으면 오히려 덧날 수 있다. 그럴 때는 적극적으로 치유해 주어야 한다. 한 부부가 양육체계로서 잘 자라려면 때에 따라서는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두면 치유가 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치유를 해야 한다.
부부는 양육체계로서 서로 새로운 힘을 주어야 한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지금은 못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어요.” 파괴적이 말보다는 어떤 가능성. 미래의 꿈과 용기를 심어주는 이야기는 새 힘을 준다. 내일 살 힘이 없어도 부부가 서로 만나고 나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는 것이 바로 가정이고 부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경기는 이기는 편이 있으면 지는 편이 있고. 또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으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부부는 아내는 합격하고 남편은 떨어지고. 아내는 지고 남편은 이기고 하는 것이 없다. 둘 다 이기든지 둘 다 지든지. 둘 다 불행하든지 아니면 둘 다 행복하든지 하는 것이다.

밝은 자화상

실제 결혼생활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이유는 자기의 자화상이 어둡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의 실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에 내 몸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다음에는 자애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자화상이 어두우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그 사랑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배우자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자기를 받아 들이고 인정하고 그것에 감사함으로써 자기의 자화상이 밝아져야 한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할 때 꼭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 자화상이 얼마나 밝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밝은 자화상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몇가지 작업이 있다.

첫째로.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특별하게 만든 아주 유익하고 귀한 존재가 바로 나이다. 자신을 낮추고 깎아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순간 순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내 자화상에 비교해서 다시 정립해야 한다.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형편없어 보일 때.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절대로 자신을 쓰레기 취급해선 안된다.

둘째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보지 않고. 사람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내 배우자가 형편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에베소서2장 10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자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실만큼 귀하게 만드셨다. 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나의 자화상은 높아지고 밝아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밝으면 그 밝음을 통해서 배우자를 밝게 볼 수 있다. 우리는 배우자를 도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바꾸려고 하는 데서 문제를 낳는 것을 본다.

세번째. 밝은 자화상을 갖기 위해서 구원받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을 여러가지로 정리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화평. 자신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며 내 삶 속에서 나와 화평을 누리는 것이 밝은 자화상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네번째로 우리가 미완성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오직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빌립보서 1장 6절의 말씀처럼 지금은 내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실수 투성이지만.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의 완전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간다는 소망 가운데서 밝은 자화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번째로 외부 환경과 내적 만족은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이론적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늘 혼돈하며 살고 있다. 외부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해서 내적 만족을 누리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외부 환경이 불행하다 해도 내적 만족이라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보람이라든지 동기. 의미 등에서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이러한 환경을. 이런 상태를 나에게 허락하셨을까. 그 의미를 찾으면 이것이 오히려 나에게 하나의 도전이 되고 밝은 자화상을 위한 좋은 주춧돌이 될 수 있다.

여섯째로 불행을 성숙의 계기로 삼을 때 밝은 자화상을 가질 수 있다.

일곱째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 나에게는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고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이다.

여덟번째. 말씀. 기도.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함으로써 나에게 도저히 불가능하고 용납할 수 없는 자화상까지도 치유되고 밝게 할 수가 있다.

행복한 결혼

실제 결혼 생활에서 어떻게 아내와 남편이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는 몇가지
구체적인 길잡이가 있다.

첫째.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엡5:22-23)
우리 크리스챤 부부의 행복한 삶의 지침을 간추려서 말하면 순종과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내와 남편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순종해야 한다.
온천하를 지배하는 왕이라 해도 한 아내에게 순종받지 못하는 남편은 굉장히 불행한 것이다.

둘째 순종해야 할 이유는 자녀의 정서 발달을 위해서 그렇다. 대개 사회적으로
문제아를 보면 그 뒤에 문제 부모가 있으며 특히나 내 주장이 강한 가정에서 많다.
에릭 프롬은 여성과 남성.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주는 정서의 면이
다르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아주 부드럽고 온유하고 사랑스럽고 따뜻하며
다정다감한 정서를 주는데 반해 아버지는 강하고 어떤 성취감. 결단력과 같은
강한 것을 주는데. 어머니마저 강해진다면 그 아이는 계속 강한 것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부딪힌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베드로전서3장 2절 말씀대로 전도를 위해서이다. 예수를 믿지 않다가 나중에 믿게된 남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원래 순종하는 여자가 아닌데 예수 믿고 나서 굉장히 순종하고 연하게 되어서 자신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남자들이 많다. 아내가 순종할 . 남편에게 전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항상 여자만 순종해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피차 순종해야 한다 (벧전5:21).


그 다음에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내를 왜 특별히 사랑해야 하는가.

1.여자는 신체적로도. 심리적으로도 남자보다 더 연약해서 말 한마디에도 깨져 버린다.
때문에 더 조심해서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해 주어야 한다. 한국 남자들은 문화적인 배경 때문에 자기 아이들은
끔찍이 위하는데. 자기 아내는 헌신짝같이 대하는 경우가 많다.

2.그 다음에 아내를 더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은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라기2장 13-15절에는 우리가 아무리 헌물을 바치고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해도 아내가 울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듣지 않고 헌금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하기 위해 수없이 연습하듯이 우리도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연습해야 하고 밝은 표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서로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부부 간에는 피부접촉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효과적인 대화로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실과 신뢰를 심으며. 바라는 자세보다는 이해와 기쁜 용납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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