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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그네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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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3-05-06 13:16 조회2,5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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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된 교회



교회(敎會). 로서의 교회의 본질을당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질중의 본질이라 할 것은의 모습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정착이란 것은 도무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나그네요, 순례자들이
교회이다.
단지 인생이 덧없이 짧거나 이 땅의 것들이 무가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인간의 영락없는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법칙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다.
인간의 죄악에 찌든 속성으로 볼 때 이유를 묻는 다는 것은 벌써
더 나은 변술(辯術)로 받아치겠다는 뜻이다. 불순종하고 반항겠다는 버젓한 도전이다.

하나님의 법칙들중에는 이유를 몰라도 일단은 순종하고 봐야할 것들이 많이 있다.
순종하고 보니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 참 많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 민족은 장막(천막)집에 거하는 떠돌이로
시작한다. 나그네
특유의 가옥형태다. 오랜 유랑의 출애굽 기간이 끝나고
그들이 튼튼한 벽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을때에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상기시킨
이스라엘의 한가지
본질은 분명했다.
--
너희는 매년 7일동안 초막을 짓고 다 초막에 거하라.
이것을 너희의 영원한 절기로 삼을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할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하려함이니라
(레23:41∼43).
형식까지 따를 필요는 없지만
영적 이스라엘 민족이된 온 세계의 교회에 이 말씀은
영원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슬그머니 성경책에서 찢어내 버려진 말씀이다.

어느 곳으로부터 불리워 내어진 사람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어떤 나라(장소적인 개념만은 아니다)를 향하여 끊임없이
떠나고 또 떠나는 나그네들, 교회.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장막에 거하셨다.
물론
상징에 불과하지만 이왕 상징일라치면 오히려 오늘의 예배당
보다는
훨씬 하나님의
속성에 가깝다고 하겠다.
어느 특정이 아니라
이스라엘--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움직이는 곳마다
무리의 제일 선두에서 당당히 나아가고, 그들이 진칠 때 누구의 장막보다도 제일 먼저
그들의 한가운데에
기준을 잡아 좌정하였던 성막(언약궤)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잘 반영한다.

하나님은 남구
남천동 28-3번지 성산교회당,
서울시 동부이촌동 38번 종점 온누리교회당등을 잘 기억해 놓으셨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부리나케 예배받으러 좇아다니는 분이 아니다.
어디 예배가 제일 멋있지 어느 기도회가
제일 많이 통곡하는지 채점하러
다니시는
국민학교 줄반장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한아름에 품고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다.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곳은 한 평도 없다.

당신이 설마 여기는 없겠지 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앉아 계신다.

너무 막연한가? 하나님은 당신의 술자리에 따라가신다.
당신들(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제아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자리중에도 한가운데,
안주가 놓여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앉으셔서 그 어색함을 견디어내고 계신다.
백데나리온의 빚을 용서못하고 둘러앉아 온갖 비방과
욕설로 를 짓밟고 있는
그 입들 입들 한가운데에서 일만달란트
용서하신 하나님은 분루(憤淚)를
삼키고 계신다.
당신이 춥고 배고픈 이들의 동전
한닢 부탁을 더럽다는듯이 외면할 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하나님은 당신의 한가운데서 침묵으로 항변하고 계신다.
당신들이 모여
그 기름진 부페접시를 비워나갈때 그 접시 한가운데 젓가락 사이사이마다
하나님은
쓰디쓴 눈물을 흘려넣고 계신다.
당신의 두툼한 고급외투 가운데 단추가 채워질때

하나님은 왠지 추워져서 옷깃을 여미신다.
온갖 음란과 교만과 탐욕과 비방과 게으름과 허황된 꿈이 나뒹구는 당신의 이부 자리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에 낱낱이 침묵으로 대답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과 귀는 우리와
달라서 당신을 주목하고 계시면서도
당신에게 외면당한 이방지대를 동시에
듣고 보신다.
창녀촌의
칸막이 침실에서 그들만의 고통과 좌절을 보고
계신다.
온갖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선거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을 낱낱이 보신다.
공단에서
달동네로 이어지는 퇴근길, 한발 한발마다 꾹꾹 눌러도
솟아오르는 절망과 서러움에
하나님은 대신 찔리고 계신다.

이상의 쾌락을 찾아 불나비처럼 타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는 압구정동 밤거리의 정제(整齊)된
광란속에서도 하나님은 허망한 분사(焚死)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고
계신다.
어버버 세마디로 모든 희로애락을
표현해야 하는 장애인의
보이지 않는 감옥속에도,
일곱이 문드러지고 겨우 남은 손가락 세개로 농사짓는 소록도의 저녁에도,
달력에 한달에 한번 간식 먹는 날을
동그라미 쳐놓고 기다리던
그 고아원 꼬맹이의 세계에도,
검은 돈과 검은 힘 앞에 온몸을 던져 저항하다 말없이 숨져가는 백성들의 몸부림속에도,...
기대했으나 당신이 다른 일에 바빠 걷어차버린
이 땅의
모든 이방지대를 하나님의 터질듯한 심정은 목도하고 계신다.

나그네됨을 거부해버린 이스라엘의 죄악

이스라엘(즉,교회)은 정착해서는 안되는 숙명을
저버렸다.
솔로몬의 시대에 그들이 성막대신 예루살렘 몇번지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는 조금씩 본질을 뒤틀어 놓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이스라엘 족속만의 대변자가 되어갔다.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자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을
못뵈러가는 북쪽 사람들은
단과 벧엘에 있는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다 하고 줄기차게
예배드렸다.

사마리아와 갈릴리/유대사람들 사이가 소원해지자

이제 하나님은 그리심산이라는 동네로
이사하셨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리심산 동네에 하나님이 이사오셨다고 믿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살고 계시다
하데요. 어느 것이 맞지요?(요4:20)"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는 당신이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오해된 버릇은 예수님의 명백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예루살렘 동네를
사수하라는 말씀으로

그들은
오해했다(행1:4과 눅24:49비교).

예루살렘에서 올망졸망 소꿉장난하며
지상낙원의 환상속에 젖어있는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강제로 로마의 박해를 이용하여 뿔뿔히 흩으셨을때에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언젠가는 이 동네로 다시 돌아오고야 말리라는
민족적 결심은 시오니즘으로 이어졌다.
비록 하나님은 모르나 의좋게 하나되어
살고 있는 아랍민족을 4000년 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어이없이
몰아내고 오늘날까지 숱한 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성전(聖戰)이라는 언어도단의
깃발을 나부끼며 아랍민족에게 총칼을 휘두르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졸지에 그들의 유랑생활을 아랍민족에게 떠넘겼다.
기억에 생생한 자칭 세계평화와
정의를 위한 전쟁, 걸프전에서 이라크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그들이 흘린 홍수같은 피와 눈물은, 결코 응징받아 마땅한 침략의 댓가가 아니었다.

오늘날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머리에 뿔달린 마귀라도 되는양 그들을 소외와 저주의 사슬로 칭칭 묶어두고
박수를 쳤던
그리스도인의
은, 오직 피값으로만 보상할 수있을 것이다.

아랍민족의 굴욕과
울분의 원인자가
되어 국익에 따라 제멋대로 그들을 주무르는 나라들에서
온 코큰 선교사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했을때,
그들이 살인적인
분노로 대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누구도 욕할 자격은 없다.
정착해서는 안될 교회가 정착하고 안주하기 시작할 때,
이 세계의 역사마저 뒤틀려간 것이다.



인간에게는 아무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아성을
쌓고
그 속에 안주해보려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어머니의 자궁을 그리워하는 병이라고 진단하였는데 그럴법도 하다.
따뜻하고
안락하고 먹고 입는 문제
심지어 숨쉬는 문제까지도 걱정없는 절대적
평온의 밀궁(密宮)을 꿈꾸는 우리 인간들은,
측량할 수 없는 천국의 가치를 감히 이 따위 차원으로 깍아내렸다.

동일한 육욕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교회당
울타리를 치고 이 선밖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썩어질 향락이라고 매도하면서,
빛좋은 기만의 옷을 입혀 줄테니 이 성역(聖域)안으로 들어오라는 은근한 초청이 전개되었다.
육욕을 고스란히 향유하되 고상하고 교활한 방법을 씀으로써,
잘하면 하게까지 보일 수 있는 가짜들이 교회안에 양산되었다.


정착하고 모여 앉을려니 그럴싸한 집이
필요했다.
몇평 공간의 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라는 등식에 힘입어
더 화려한 교회당을 선의로(?) 세우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심이 자라는 만큼 교회당의
부동산적 치부도 자라가고,
돈과
세력을 가진 자들의 많은 부정과 불의(전부는 아니지만)앞에 침묵으로 야합하여
정치적 안존의 입지를 든든히 다져나갔다. 당신들의 천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적 타협이요, 지혜였다.

많은 사람속에 끼어있어야 안심하는 인간의 심리를
잘 이용하여 교인숫자 올리기가
지상 명령인양 호도(糊塗)하고 온 성도가
정신빼놓고 모든 정열을 이것에 다 쏟아붓 도록 만들었다.
은 무수한 의심을 얼마든지 묵살시켜 주었다.
손만 들면 구원받는 부흥회를 만들고,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는 간증이 있는 교회마다
사람들은 우루루 우루루 몰려다니게 만들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 있다.
앉아 있으면
눕고 싶게 되어 있다.
집이 생기면 돈을 모으고 싶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제도가 필요하게 되어 있다.
물론 교회가
속성도 있음을 부정하진
않지만 본질은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

백번 양보해서 중점이라도 흩어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뒤집어지면서 이 땅의 신음소리를 깔아뭉개고
세속과 교회의 있을 수 없는
괴리는 점점 깊어만
갔다.
예수믿는(?) 세련된 선데이 그룹들이 많아지면서,
지성인이 되려면 일주일에
한시간씩 교회당 건물속에서 졸아주는
처세술은 가져야 한다는
무언의 협박을 모두가 당하고
있다.

정치권보다도 더 비겁한 세력다툼이
구역, 당회, 노회, 총회, 교파, 교단들로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철저히 비성경적인 민주주의 제도가 복음인양 체제유지의 시녀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아마 이쯤에서 누군가
나를 빨갱이라고 잡으러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이기에 반드시 무너져야만
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가
틀렸다 하는 사람은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는 흑백논리도
기실 근원을 따지면 교권유지에 팔아 넘긴 병든 말씀에서
나왔다).
이에 대한 어리석은 반발심으로 완전히 성경을 곡해한 공산주의가 못가진자의

메시야가 되기 시작했다.
절충한답시고 박쥐같은 사회주의가 예수 사회의 완성형인양 제시되기 시작했다.


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빚어낸 셀 수 없는 죽음과 혼돈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바로 우리 에 있다.
교회가 세계 역사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끈질기게 구정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쓰여지던 헌금이 체제유지비,
교세확장비로 변질되면서 가난한 자들의
숨통을 죄어 왔다.
무모하고 유치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대형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감을
누가 아픔없이
꾸짖을
수 있는가. 사회에서 냉대받고 교회에 머리를 숙였으나
끝내 멸시의 발길질을 한번 더 당하고 내쫓겨버린 이들의 당연한 욕설을, 거룩하기 짝이 없는
교회들이여, 무어라고
받아칠텐가. 살아있는 복음을 죽여서 갈갈이 해부해버린 들이
많이 배운자의 지식욕을
충족시켜주기에 소위,
말씀으로 경쟁적으로 평가되는
속에서, 못배운
사람들의 서러운 비애는 어떻게 보상해주려는가.
각이 잘 다듬어져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십자가와, 빨강, 파랑,
노랑 스테인드 글라스로
예쁘게 단장된 예수님의 동화같은 얼굴을 보여주면서,
제자된다는 것이 뭔지 이해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손가락질 하려는가.


감히 떨리는 마음으로
예언하건대,
정착지향의 못된 버릇을
교회가 내려놓지 않는다면,
100년이 못가 이 땅의 화려한 교회당
건물들은 다 멸절되거나 괴괴한 폐성(廢城)으로
거미줄이 쳐질지
모른다.
그때까지도 이 땅의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교회당 건물안에
힘쓰고,
이부자리 짓기에만 바쁘다면,
온 교회는 교회당의 운명과 자리를 함께 하고 말 것이다.

나그네여, 새벽을 향해 떠나자
교회는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온 몸을 떨며 을
꿈꿔본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더 이상 아무런 특권도 아닌 사회를 위하여,
교회는 나그네됨을 회복해야만 한다.

특권이란 소수를 전제로 한다. 다수의 특권이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 둘 늘어가고 가 되어가길 진정 원한다면,
설령
소수일때 얼마간 지니고 있던 특권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교회여! 나그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회복하자.
너무 모으려고도 말고 너무 아끼려고도 말고 너무
계획하려고도 말고

간소한 차림으로 떠날 준비를
하자.
잠자는 자는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자.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이기심의 벽돌로 쌓아올린 아성(我城)을 허물고 안락한 보금자리도 아쉽지만 걷자.
요람이 비록 편안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와야 어른이 된다.
우리의 갈 곳을
정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자.
나그네는 오직 죽을 때에만 발길을 멈출 수 있다.
그리 멀지않아 길 떠날수 없는 밤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밤의
정점을 넘어
새로운 태양이 뜨는 새벽이 조용하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히 13:13-4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빌 3:18-21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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