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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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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3-05-06 13:17 조회2,4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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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서 가난을 배우는 교회가 되자

교회가 가난해지면 사회가 깨끗해진다

나는 금욕주의자도 아니요 돈을 죄악시하는 편향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어디에도 부자가 되는 일에 칭찬한 것을 볼 수가 없다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은 구분하자
교회가 부자 되는 것과 성도들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도 조금은 구분을 하자)
중요한 것은 "세상"보다는 "천국"이 더 크고 멋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에
교회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를
생각한다.
갈릴리 나사렛의 초라한 목수 요셉이 아내와
함께 호적하러 고향에 갔다
여관방 하나 구하지 못하고 말구유에 인류의 구세주 예수를 낳는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죽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마8:20).
예수님은 십자가에
벗은 몸으로 달리셨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
3일 묵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한 자를, 죄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자기 편리한대로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하지 마라


교회는 예수님에게서 가난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 다와지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된다.
예수님의 가난을 배워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 부요하고 하나님과 하나되기위함이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함이다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예수님을 더 온전히 따르기위함일 뿐이다
예수님이 목적이지
사람의 의를 나타내고자함이 아니다
교회가 에수님의 가난을 배워야하는 이유도
에수님을 따라가는데 바탕이되고 기초가되는 것이다
입술은 달콤한데
삶은 냄새가나는 교회가 되지않고자 함이다
깨끗한 부자, 당당한 부자라고 말하지 말자
돈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끌리지 않는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시 119: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시 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사람은 두마음을 품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게 되어 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교회가 예수님의 가난을 배우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택하신 이 가난에 제자들도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되어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우리는 부자 되어 따르려 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 나라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거지에게
"내가 너에게
줄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였다.
이제 교회는 예수외에 줄 것이 없는
가난한 교회가 될 때
부요한 교회가 되어질 것이다.

교황 이노센트
2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는
시대는 지났다"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폐하여, 옳은
말씀이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2천년 교회사에서 교회당 벽을 금으로 붙이고,

부를 누렸던 시대는 타락했고, 냄새가 났다.
그러나 가난해지려고 했던 제자들이 있던
시대는 살아 있었다.
결국 교회는 부자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
얼마나
큰 교회당이 있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에 참여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이 가난해지는 일이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자비의 첫 단계이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
물질이 없어서
가난이 아니다.
물질로부터
자유하고 가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은 신성한
가난이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가난한
존재임을 바로 알고 나누어 줌으로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와 자신을 일치시킴으로 가난하게 될

그리스도의 부요에 이르게 된다.
이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소유하게 되고 천국은 자기 삶의 터전이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복이라면 이제 가난하게 사는 훈련을 하여야
된다.
가난해지는 것과 가난뱅이는
다르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방탕해서
가난한 것은 저주다.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가난은 지옥의 그림자이다.
예수님처럼 부자임에도
스스로 가난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는 복 있는 자다.
여기에서 빈곤(貧困)과 성빈(聖貧)은 다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난해 진 사람은 인생의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많이 가진 부자 보다 많이 나누어 주는 부자가 좋고,
가난해질 수 있는 부자는 더욱 위대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부자를 부러워 하지도 않는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며 살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신 목적이 있다.
적빈락도(赤貧樂道) 하려는 군자의
정신이 아니다.

그의 가난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어떤 부자도
구제로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를 구제함으로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백성과 동일시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구제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했다.
오히려 백성 속의 한 사람이 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사람들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 25:40)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독교 자선활동의 구제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저들을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형제됨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백성을
섬기는 대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백성중을 자신의 형제로 일치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빵이나 먹이고, 헐벗는 자에게 옷을 입히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와서 보는 것으로써 최선을 다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한 자가 되어 주었고,
헐벗는 자에게 헐벗은 자로 사셨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목마름에 참여했고,
나그네로 일생을 살아 나그네를
자기 형제로 영접했다.
병든
자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옥에 갇힌
죄인들과 같이 되어
죄인으로 죽었다.
그는 죄인들이
있는 옥으로 들어갔으며
그들과 같이 되었다.

예수님은 몸을 입고 성육신
하므로 백성과 일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여기에서만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할 수 있다.
오늘 이
시대의 빈부의 갈등, 노사문제의
불화는 물질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 심령속에 가난해지려는
영성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류 구원과
사회의 평화는 물성화 되어 가는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영성화시킬 때만 가능한 것이다.

먼저 교회가 영성을 회복해야한다
설교는 하나님 하나님 하는데 교회 현실은 돈돈돈 한다
오늘날 사회를
정화하는 유일한 길은 이
민족을 물성화 되는

비인간화에서 구제하는 길이다.
지금 이 사회의 도덕성의 타락과 사회의 모든 부조리, 범죄의 급증이
결국은 인간이 물성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비극이다.
이 민족의
양심을 회복하는 길은 교회 지도자가 먼저 가난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빚진 자다.

이제 교회는 백성을 구제하거나 자선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백성은
예수님이 돌보고 도와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진 빚을 그들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우리의 소유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에
가진 것이
하나님께 진 빚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있는 백성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위로 하나님(예수)에게서 받고,
땅에 있는 예수의
형제로 서 있는 백성들에게 갚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물질적으로
구제하는 일은 열심히 한다.
그러나 저들에게
빚진 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과 대립하게 될 때 전혀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을 물질적으로 평가하면 그들은
안가진 자요,
우리들은 가진 자가 된다.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어느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 옷을 임자에게 돌려주자고 했다.

그리고 자기 옷을 주려고 벗었다. 그때 제자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우리의
옷임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의 옷을 빌려 왔습니까?"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께 빌려온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의 것이요, 하나님이 주고 싶은 자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자가 임자요,
필요한 자가
주인이다.
우리의 것은 가난한 자가 나타날 때 그가 임자이니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에
가져야 할 주인의 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도둑놈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자에게 돌려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였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 가난한 형제에게서 예수를 본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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