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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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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4-05-11 20:11 조회2,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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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그네
교회





히 13:13-4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빌 3:18-21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교회는 나그네이다

교회(敎會). 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당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질중의 본질이라 할 것은의 모습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정착이란 것은 도무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나그네요, 순례자들이다
단지 인생이 덧없이 짧거나 이 땅의 것들이 무가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인간의 영락없는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법칙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다.
인간의 죄악에 찌든 속성으로 볼 때
이유를 묻는 다는 것은 벌써 더 나은 변술(辯術)로 받아치겠다는 뜻이다.
불순종하고 반항겠다는 버젓한 도전이다.
하나님의 법칙들 중에는
이유를 몰라도 일단은 순종하고 봐야할 것들이 많이 있다.
순종하고 보니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 참 많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選民 이스라엘 민족은 장막(천막)집에 거하는 떠돌이로 시작한다.
나그네
특유의 가옥형태다. 오랜 유랑의 출애굽 기간이 끝나고
그들이 튼튼한 벽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상기시킨 이스라엘의 한가지
본질은 분명했다.
너희는 매년 7일동안 초막을 짓고 다
초막에 거하라.
이것을 너희의 영원한 절기로 삼을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하려함이니라(레23:41∼43).
형식까지
따를 필요는 없지만
영적 이스라엘 민족이 된 온 세계의 교회에

말씀은 영원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슬그머니 성경책에서 찢어내 버려진 말씀이다.
어느 곳으로부터 불리워 내어진 사람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어떤 나라(장소적인 개념만은 아니다)를 향하여
끊임없이 떠나고 또 떠나는 나그네들이 교회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장막에 거하셨다. 물론
상징에 불과하지만 이왕 상징일라치면
오히려 오늘의 예배당
보다는 훨씬 하나님의
속성에 가깝다고 하겠다.
어느 특정이 아니라
이스라엘--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움직이는 곳마다 무리의 제일 선두에서 당당히 나아가고,
그들이 진칠 때 누구의 장막보다도 제일 먼저 그들의 한가운데에

기준을 잡아 좌정하였던 성막(언약궤)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잘 반영한다.
하나님은 남구
남천동 28-3번지 **교회당,
서울시 동부이촌동 38번 종점
888교회당 등을 잘 기억해 놓으셨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부리나케 예배 받으러 좇아다니는
분이
아니다.
어디 예배가 제일 멋있지 어느 기도회가
제일 많이 통곡하는지 채점하러
다니시는 국민학교 줄 반장 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한아름에 품고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다.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곳은 한 평도 없다.

당신이 설마 여기는 없겠지 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앉아 계신다. 너무 막연한가?
하나님은 당신의 술자리에 따라가신다.
당신들이(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제아래)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자리 중에도 한가운데, 안주가 놓여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앉으셔서
그 어색함을 견디어내고 계신다. 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 못하고 둘러앉아
온갖 비방과
욕설로 를 짓밟고 있는 그 입들 입들 한가운데에서
일만 달란트
용서하신 하나님은 분루(憤淚)를
삼키고 계신다.
당신이 춥고 배고픈 이들의 동전
한 닢 부탁을 더럽다는듯이 외면할 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하나님은 당신의 한가운데서 침묵으로 항변하고 계신다.
당신들이 모여
그 기름진 뷔페 접시를 비워나갈 때
그 접시 한가운데 젓가락 사이사이마다
하나님은 쓰디쓴 눈물을 흘려 넣고 계신다.
당신의 두툼한 고급외투 가운데 단추가 채워질 때

하나님은 왠지 추워져서 옷깃을 여미신다.
온갖 음란과 교만과 탐욕과 비방과 게으름과 허황된 꿈이 나뒹구는
당신의 이부자리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에 낱낱이 침묵으로 대답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과 귀는 우리와
달라서 당신을 주목하고 계시면서도
당신에게 외면당한 이방지대를 동시에
듣고 보신다.
창녀촌의
칸막이 침실에서 그들만의 고통과 좌절을 보고
계신다.
온갖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선거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을 낱낱이 보신다.
공단에서
달동네로 이어지는 퇴근길,
한발 한발마다 꾹꾹 눌러도
솟아오르는 절망과 서러움에
하나님은 대신 찔리고 계신다.

이상의 쾌락을 찾아 불나비처럼 타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는
압구정동 밤거리의 정제(整齊)된
광란 속에서도
하나님은 허망한 분사(焚死)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고
계신다.
어버버 세 마디로 모든 희로애락을
표현해야 하는
장애인의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도,

일곱이 문드러지고
겨우 남은 손가락 세 개로 농사짓는 소록도의 저녁에도
달력에 한 달에 한번 간식 먹는 날을
동그라미 쳐놓고 기다리던
그 고아원 꼬맹이의 세계에도,

검은 돈과 검은 힘 앞에 온몸을 던져 저항하다 말없이 숨져가는
백성들의 몸부림 속에도,...
기대했으나 당신이 다른 일에
바빠 걷어차 버린
이 땅의
모든 이방지대를 하나님의 터질듯한 심정은 목도하고 계신다.

나그네 됨을 거부해버린 이스라엘의 죄악

이스라엘(즉,교회)은 정착해서는 안되는 숙명을
저버렸다.

솔로몬의 시대에 그들이 성막대신
예루살렘 몇 번지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는 조금씩 본질을 뒤틀어 놓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이스라엘 족속만의 대변자가 되어갔다.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자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을
못 뵈러가는
북쪽 사람들은 단과 벧엘에 있는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다 하고
줄기차게
예배드렸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과 유대사람들 사이가
소원해지자
이제 하나님은 그리심 산이라는 동네로
이사하셨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 요4:20
"우리는 그리심 산 동네에 하나님이 이사오셨다고 믿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살고 계시다
하데요. 어느 것이 맞지요?"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는 당신이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오해된 버릇은 예수님의 명백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예루살렘 동네를
사수하라는 말씀으로 그들은
오해했다
(행1:4과 눅24:49비교).
예루살렘에서 올망졸망 소꿉장난하며
지상낙원의 환상 속에 젖어있는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강제로 로마의 박해를 이용하여
뿔뿔이 흩으셨을 때에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언젠가는 이
동네로
다시 돌아오고야 말리라는 민족적 결심은 시오니즘으로 이어졌다.

비록 하나님은 모르나 의좋게 하나되어
살고 있는 아랍민족을
4000년 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어이없이 몰아내고
오늘날까지 숱한 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성전(聖戰)이라는 언어도단의
깃발을 나부끼며
아랍민족에게 총칼을 휘두르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졸지에 그들의 유랑생활을 아랍민족에게 떠넘겼다.
기억에 생생한 자칭 세계평화와
정의를 위한 전쟁,
걸프전에서 이라크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그들이 흘린 홍수 같은 피와 눈물은, 결코 응징받아 마땅한
침략의 댓가가 아니었다. 오늘날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머리에 뿔달린 마귀라도 되는 양 그들을 소외와 저주의 사슬로 칭칭 묶어두고
박수를 쳤던
그리스도인의
은,
오직 피 값으로만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랍민족의 굴욕과
울분의 원인자가
되어 국익에 따라
제멋대로 그들을 주무르는 나라들에서 온 코 큰 선교사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했을 때,
그들이 살인적인
분노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누구도 욕할 자격은 없다.
정착해서는 안될 교회가 정착하고 안주하기 시작할 때,
이 세계의 역사마저 뒤틀려간 것이다.

이 땅의 교회엉덩이가 깔고 앉아버린 것들
인간에게는 아무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아성을
쌓고
그 속에 안주해보려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어머니의 자궁을 그리워하는 병이라고 진단하였는데
그럴법도 하다. 따뜻하고
안락하고 먹고 입는 문제 심지어 숨쉬는 문제까지도
걱정 없는 절대적 평온의 밀궁(密宮)을 꿈꾸는 우리 인간들은,
측량할 수
없는 천국의
가치를 감히 이 따위 차원으로 깍아내렸다.
동일한 육욕에서 출발하였으면서,
교회당
울타리를 치고
이 선 밖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썩어질 향락이라고 매도하면서,
빛 좋은 기만의 옷을 입혀 줄테니
이 성역(聖域)안으로 들어오라는 은근한 초청이 전개되었다.
육욕을 고스란히 향유하되 고상하고 교활한 방법을 씀으로써,
잘하면 하게까지 보일 수 있는 가짜들이 교회 안에 양산되었다.
정착하고 모여 앉을려니 그럴싸한 집이 필요했다.
몇 평 공간의 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라는
등식에 힘입어 더 화려한 교회당을 선의로(?) 세우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심이 자라는 만큼 교회당의
부동산적 치부도 자라가고,
돈과
세력을 가진 자들의 많은 부정과 불의(전부는 아니지만)앞에
침묵으로 야합하여 정치적 안존의 입지를 든든히 다져나갔다.
당신들의 천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적 타협이요, 지혜였다.
많은 사람 속에 끼어있어야 안심하는 인간의 심리를
잘 이용하여
교인숫자 올리기가 지상 명령인양 호도(糊塗)하고
온 성도가
정신 빼놓고 모든 정열을 이것에 다 쏟아붓도록 만들었다.
은 무수한 의심을 얼마든지 묵살시켜 주었다.
손만 들면 구원받는 부흥회를 만들고,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는 간증이 있는
교회마다 사람들은 우루루 우루루 몰려다니게 만들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 있다.
앉아 있으면
눕고 싶게 되어 있다.
집이 생기면 돈을 모으고 싶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제도가 필요하게 되어 있다.
물론 교회가
속성도 있음을 부정하진
않지만
본질은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

백 번 양보해서 중점이라도 흩어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뒤집어지면서 이 땅의 신음소리를 깔아뭉개고

세속과 교회의 있을 수 없는 괴리는 점점 깊어만
갔다.
예수믿는(?) 세련된 선데이 그룹들이 많아지면서,
지성인이 되려면 일주일에
한시간씩 교회당 건물 속에서 졸아주는
처세술은 가져야 한다는 무언의 협박을 모두가 당하고
있다.
정치권보다도 더 비겁한 세력다툼이 구역, 당회, 노회, 총회, 교파, 교단들로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철저히 비성경적인 민주주의 제도가 복음인양
체제유지의 시녀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아마 이쯤에서 누군가
나를 빨갱이라고 잡으러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이기에 반드시 무너져야만 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가
틀렸다 하는 사람은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는 흑백논리도 기실 근원을
따지면 교권유지에 팔아 넘긴 병든 말씀에서
나왔다
이에 대한 어리석은 반발심으로 완전히 성경을 곡해한 공산주의가
못 가진자의
메시야가 되기 시작했다. 절충한답시고
박쥐같은 사회주의가 예수 사회의 완성형인양 제시되기 시작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빚어낸 셀 수 없는 죽음과 혼돈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바로 우리 에 있다.
교회가 세계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끈질기게 구정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쓰여지던 헌금이 체제유지비, 교세 확장비로 변질되면서
가난한 자들의
숨통을 죄어 왔다. 무모하고 유치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대형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감을 누가 아픔 없이
꾸짖을
수 있는가.
사회에서 냉대받고 교회에 머리를 숙였으나
끝내 멸시의 발길질을 한번 더 당하고 내쫓겨버린 이들의 당연한 욕설을,
거룩하기 짝이 없는 교회들이여, 무어라고
받아칠텐가.
살아있는 복음을 죽여서 갈갈이 해부해버린 들이
많이 배운 자의 지식욕을
충족시켜주기에
소위,
말씀으로 경쟁적으로 평가되는
속에서, 못 배운
사람들의 서러운 비애는
어떻게 보상해주려는가.
각이 잘 다듬어져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십자가와,
빨강, 파랑,
노랑 스테인드 글라스로 예쁘게 단장된
예수님의 동화같은 얼굴을 보여주면서,
제자된다는 것이 뭔지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손가락질하려는가.

감히 떨리는 마음으로 예언하건대,
定着指向의 못된 버릇을
교회가 내려놓지 않는다면,
100년이 못가 이 땅의 화려한 교회당
건물들은 다 멸절되거나
괴괴한 폐성(廢城)으로 거미줄이 쳐질지
모른다.
그때까지도 이 땅의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교회당 건물 안에
힘쓰고, 이부자리 짓기에만 바쁘다면
온 교회는 교회당의 운명과 자리를 함께 하고 말 것이다.
나그네여, 새벽을 향해 떠나자 !
나그네여, 새벽을 향해 떠나자 !
나그네여, 새벽을 향해 떠나자 !

교회는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온 몸을 떨며 을
꿈꿔본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이상 아무런 특권도 아닌 사회를 위하여,
교회는 나그네 됨을 회복해야만 한다.
특권이란 소수를 전제로 한다.
다수의 특권이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 둘 늘어가고
가 되어가길 진정 원한다면,
설령
소수일 때 얼마간 지니고 있던 특권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교회여! 나그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회복하자.
너무 모으려고도 말고 너무 아끼려고도 말고 너무 계획하려고도 말고
간소한 차림으로 떠날 준비를
하자.
잠자는 자는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자.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이기심의 벽돌로 쌓아올린 아성(我城)을 허물고
안락한 보금자리도 아쉽지만
걷자.
요람이 비록 편안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와야 어른이 된다.
우리의 갈곳을
정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자.
나그네는 오직 죽을 때에만 발길을 멈출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아 길 떠날 수 없는 밤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밤의
정점을 넘어
새로운 태양이 뜨는 새벽이 조용하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에게서 가난을 배우는 교회가 되자

교회가 가난해지면 사회가 깨끗해진다
나는 금욕주의자도 아니요 돈을 죄악시하는 편향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어디에도 부자가 되는 일에 칭찬한 것을 볼 수가 없다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은 구분하자
교회가 부자 되는 것과 성도들 개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도 조금은 구분을 하자)
중요한 것은 "세상"보다는 "천국"이 더 크고 멋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에
교회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를
생각한다.
갈릴리 나사렛의 초라한 목수 요셉이 아내와
함께 호적하러 고향에 갔다
여관방 하나 구하지 못하고 말구유에 인류의 구세주 예수를 낳는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죽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마8:20).
예수님은 십자가에
벗은 몸으로 달리셨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
3일 묵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한 자를 만나러 다녔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자기 편리한대로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하지 마라
교회는 예수님에게서 가난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된다.

예수님은 스스로 택하신 이 가난에 제자들도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되어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우리는 부자 되어 따르려 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 나라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거지에게
"내가 너에게
줄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였다.
이제 교회는 예수 외에 줄 것이 없는
가난한 교회가 될 때
부요한 교회가 되어질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교회당 벽을 금으로 붙이고,

부를 누렸던 시대는 타락했고, 냄새가 났다.
그러나 가난해지려고 했던 제자들이 있던
시대는 살아 있었다.
결국 교회는 부자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
얼마나
큰 교회당이 있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에 참여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이 가난해지는 일이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자비의 첫 단계이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
물질이 없어서
가난이 아니다.
물질로부터
자유하고 가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은 신성한
가난이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가난한
존재임을 바로 알고 나누어 줌으로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와 자신을 일치시킴으로 가난하게 될

그리스도의 부요에 이르게 된다.
이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소유하게 되고 천국은 자기 삶의 터전이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복이라면 이제 가난하게 사는 훈련을 하여야
된다.
가난해지는 것과 가난뱅이는
다르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방탕해서
가난한 것은 저주다.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가난은 지옥의 그림자이다.
예수님처럼 부자임에도
스스로 가난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는 복 있는 자다.
여기에서 빈곤(貧困)과 성빈(聖貧)은 다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난해 진 사람은 인생의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많이 가진 부자 보다 많이 나누어 주는 부자가 좋고,
가난해질 수 있는 부자는 더욱 위대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부자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며 살 수 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신 목적이 있다.
적빈락도(赤貧樂道) 하려는 군자의
정신이 아니다.

그의 가난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어떤 부자도
구제로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를 구제함으로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백성과 동일시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구제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했다.
오히려 백성 속의 한 사람이 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사람들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 25:40)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독교 자선활동의 구제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저들을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형제됨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백성을
섬기는 대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백성들을 자신의 형제로 일치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빵이나 먹이고, 헐벗는 자에게 옷을 입히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와서 보는 것으로써 최선을 다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한 자가 되어 주었고,
헐벗는 자에게 헐벗은 자로 사셨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목마름에 참여했고,
나그네로 일생을 살아 나그네를
자기 형제로 영접했다.
병든
자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옥에 갇힌
죄인들과 같이 되어
죄인으로 죽었다.
그는 죄인들이
있는 옥으로 들어갔으며
그들과 같이 되었다.

예수님은 몸을 입고 성육신
하므로 백성과 일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여기에서만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할 수 있다.
오늘 이
시대의 빈부의 갈등, 노사문제의
불화는 물질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 심령속에 가난해지려는
영성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류 구원과
사회의 평화는 물성화 되어 가는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영성화시킬 때만 가능한 것이다.

먼저 교회가 영성을 회복해야한다
설교는 하나님 하나님 하는데 교회 현실은 돈돈돈 한다
오늘날 사회를
정화하는 유일한 길은 이
민족을 물성화 되는

비인간화에서 구제하는 길이다.
지금 이 사회의 도덕성의 타락과 사회의 모든 부조리, 범죄의 급증이
결국은 인간이 물성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비극이다.
이 민족의
양심을 회복하는 길은
교회 지도자가 먼저 가난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빚진 자다.

이제 교회는 백성을 구제하거나 자선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예수님이 돌보고 도와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진 빚을 그들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우리의 소유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에
가진 것이
하나님께 진 빚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있는 백성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위로 하나님(예수)에게서 받고,
땅에 있는 예수님의
형제로 서 있는 백성들에게 갚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물질적으로
구제하는 일은 열심히 한다.
그러나 저들에게
빚진 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과 대립하게 될 때 전혀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을 물질적으로 평가하면 그들은
안가진 자요,
우리들은 가진 자가 된다.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 옷을 임자에게 돌려주자고 했다.

그리고 자기 옷을 주려고 벗었다. 그때 제자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우리의
옷 임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의 옷을 빌려 왔습니까?"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께 빌려온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의 것이요, 하나님이 주고 싶은 자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자가 임자요,
필요한 자가
주인이다.
우리의 것은 가난한 자가 나타날 때 그가 임자이니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에
가져야 할 주인의 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도둑놈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자에게 돌려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였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 가난한 형제에게서 예수를 본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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