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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지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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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5-06-06 22:44 조회2,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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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지도력

한국의 전형적 지도자 상(像)을 흔히 소나무에 비긴다.
소나무가 주는 이미지는 카리스마를 지닌 초월적 지도력(super leadership)이다.
다른 소나무 주변에는 대체로 다른 거목이 자라지 못하고
그저 잔챙이들만 군거할 뿐이다.
토양의 자양분을 홀로 빨아들여 자기 몸을 키우기 때문에
다른 나무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대대로 비범하고 출중한 지도자를 추구해왔다.
이런
유형의 지도자는 필경 독재하게 돼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네 정치, 사회, 경제, 종교 전반에 이름 석자를 남긴 지도자 치고
독재자 아닌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독재를 증오하면서도 정작 독재자가 사라지면 불안해하며
새로운 독재자를 찾는 이율배반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도해 왔다.
결국 군사독재냐 문민독재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네 사회와 정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적은 없었다.
오죽했으면 애국가에까지 남산 위에 저 소나무가 등장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백성들 한 사람 한사람이 온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기독교 기관이나 교회는 어떠한가?
더하면 더하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력 갱신과 성경적 교육철학의 함양을 위해
수년 전에 시작된
바나나 농장 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나나 나무를 한 그루 심어놓으면 자기도 열매를 많이 맺지만
주변을 온통 바나나 밭으로 만들어버린답니다.
소나무가 제아무리 웅대해도
소나무 밭 보다 많은 분량의 솔방울을 생산해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혼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독야청청 하는 소나무보다는
바나나 나무처럼 자기와 같은 제자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딤후 2:2)
지도자와 제자의 간격을 극소화하는 지도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은 소나무라도 쎄코이야(seequoia)는 뿌리가 얕은 단점을
여러 나무들이 서로 뿌리를 얼기설기 엮음으로 극복한다고 합니다
그가 없으면 소속 단체나 교회가 무너지는 그런 지도력은 건강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다소 역설적인 말 같지만,
성경적인 지도자는 자신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성공적 선교사역의 척도는
선교사가 불필요한 토착교회를 세우는 데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선교사역의 성패는 선교사가 사역하는 기간이 아니라
선교사가 떠난 후에야 진정한 평가가 가능하다.

결국 성경적 지도력과 사역철학은 요즘 세간에서 강조하는 특별화나 차별화가 아니다
동질화 및 재생산이란 개념에 있다 하겠다.
성직자와 평신도, 엘리트와 일반인 등으로 구별하고 계층을 나누는 것은
이원론적이거나 유교적이라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성경적 개념이라 할 수는 없다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이 한 두 사람의 지도력에 달려있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주님의 교회가 어찌 특정 지도자의 역량에 의해 제한돼야 한다는 말인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성장정체 및 감소 위기의
타개는
또 다른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등장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지도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만인제사장 직(職)을 회복함으로 「복음적 바나나 밭」을 일구는데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한 핵심적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성도가 공유하는 것이다
성경이 지도자나 기득권 층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은
대대로 영적 암흑시대의 공통적 특징이었다.
우리네 교계에서도 평신도가 주석이나 신학서적을 접하는 것을 금한
그런 시대도 있었다. 주님을 만난 지 수십 년이 되었고 평생 교회를 다녔어도
여전히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목회자가 씹어주는 죽만을
겨우 소화시키는 성도들이 많은 한 한국교회의 장래는 어둡다.
종교개혁의 동력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 교회갱신의 良藥이자 올바른 선교의 비결이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이렇게 탄식 헌다.
"이 성경이 모든 지역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의 눈에 읽히고 그들의 귀와 가슴에 전달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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