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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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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4-10-28 20:56 조회3,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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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의 인연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 부는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유독 그가 생각난다.
초년 교도관 시절, 그와의 만남은 참 운명적이었다.
아니 크나큰 은총이었다.
소심한 나는 직장에서 수용자를 상대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은
직업 그 이상의 가치를 찾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었다.

20대 초반인 그는 참 당돌했다.
관규(官規)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용수철 같은 성격으로
수용생활 중에 빈번하게 마찰을 일으켰다.
급기야 징벌방에 수용되고 말았는데 그와의 만남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가능하면 나는 그의 얘기를 들어 주었다.
왠지 그는 거친 성격에 비해 여린 마음을 곧잘 드러내 보이곤 하였다
결국 그는 중범이어서 15년 징역형을 받고 지방교도소로 이감을 갔고
그의 징역살이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교도소를 전전하며 예의 모난 성격을 과시하는 사고뭉치였다.
그 와중에서도 나와는 교제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독방에 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어차피 사람은 다 불완전한 존재인 까닭에
절망에 빠진 그를 향한 종교적인 구원을 간구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때 그 기도와 따뜻한 손길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구금시설인 청송교도소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편지를 읽어보고는 또 다른 고민을 안게 되었다.
뜬금없이 내 가족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는 것이 아닌가.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내 단란한 가족 사진이 차디찬 독방에 웅크린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짐짓 뜨악하기만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가족사진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나를 형으로 부르고 있다.
사실 수용자와 교도관은 법적으로 냉정한 관계임에도
나는 그 애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15년형을 꼬박 채우고 출소했다.
내게 남긴 것은 수북한 편지 더미였다.
나는 그저 그의 간곡한 편지에 틈틈이 답장하면서
더러 영치금과 책 등을 보내준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차츰 기억에서 사라질 무렵, 낯 설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다짜고짜 “형님! 접니다…”라고 소리치는데 도무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내 앞에 나타난 그는 딴 사람이었다.
더구나 첫돌 지난 어린 딸과 부인을 인사시키는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절망을 넘어 다시금 꿋꿋하게 일어선 그를 보노라니
덩달아 행복해지는 기분이었고 보람이요 큰 기쁨이었다.

28일은 ‘교정의 날’이다.
안타깝게도 교정의 참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이 기회에 묵묵히 범죄자 교정업무에 정성을 쏟는
교도관들의 고충과 교도소에 대한
적극적이고 따뜻한 인식이 확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최 기훈/영등포구치소 교도관



한겨레신문 2004.10.28 오피니언쪽 독자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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