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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성찰 없는 시대의 비극과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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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07-12-20 22:54 조회2,6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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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성찰 없는 시대의 비극과 새로운 시작    [시론]2007년 대선이 남긴 교훈       2007-12-20 오전 10:06:41        역사가 언제나 일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겪어야 할 바가 있다면 제대로 겪는 것이 좋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신속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일일 것이다.    기댈 언덕을 잃어버린 사회의 아픔꼭 10년 전이었다. 1997년 대한민국이 겪었던 금융위기는, 한국인들에게 "자기는 다른 누가 아닌 자기가 챙겨야 한다."는 신조를 뼈저리게 심어주었다. 국가는 침몰하는 배를 구하겠다고 이른바 "불필요 판정"을 받은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 줄은 알았지만, 그 배를 함께 살려낼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었고 목표로 설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믿을 것은 결국 각자 자기뿐이었다. "돈이 없으면 더 이상 미래는 없다"는 처절한 생존철학도 점차 그렇게 굳건해지게 되었다.여타의 가치와 생각이 의미를 가질 여지는 없었다. 인간적 사회를 꿈꾸는 이 시대의 인문주의적 사고는 그렇게 해서 이름 모를 첨탑 안에 유폐되고 말았다.  현실은 잔혹했고 약육강식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미래를 맡기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정과 정책에 기대어 비빌 언덕은 사라져갔고 보통 사람들의 삶은 파괴되어 갔다. 백보 양보해서 김대중 정권 때야 이전 정권의 과오를 해결하느라 다급했다고 친다 해도, 제2기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민생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줄 줄로 알았다.    자기성찰이 없는 오만한 권력
그러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희망은 "시장의 논리"라는 이름 아래 무너져 갔다.힘 센 자들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괴물은 권력과 하나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세상을 바꿀 투철한 의지와 섬세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도리어 그 괴물의 힘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꾸준히 있었지만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일갈하며 퇴짜를 놓았다. 투기자본은 득세했고, 대자본은 이 사회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서민을 위한 경제를 기대했던 지지자들은 모두 쓰라리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오만한 집권세력은 민심의 아우성에 아랑곳없이 나 정도면 잘 났지 뭘 그리 불평이 많으냐고 다그쳤다. 탄핵의 위기를 민심이 지켜주었지만, 권력자의 교만한 마음은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자기성찰이 전무한 권력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중심에 있던 세력이 아무리 용을 써도 2007년 대선에서 이긴다는 것은 그래서 애초에 무망한 노릇이었다. 민심에 귀를 막고 있던 세력이 어떻게 민심을 자기편으로 끌어 다닐 수 있겠는가? 이제 확실하게 판명이 났지만, 다수의 민심은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우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속 시원하게 심판을 하고 싶다는 철석같은 결심을 이미 해버린 뒤였다.    "너희는 아니거든"이라는 소리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민생을 저버린 권력에 대한 반격이었다. 그건 시대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폭풍이었다.  막바지 단일화를 해보겠다고 주창한 반부패 전선의 중심에는, 그런 까닭에 노무현 정권과 관련된 세력이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쳐봐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백했다. "그래도 너희는 아니거든"이라는 민심의 반감을 누가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패전의 상처로 힘겨워 하고 있을 이 시각에는 위로와 재출발의 용기가 필요할 터인데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리려는 것이 아니다. 지지율을 계산하는 정치공학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역사의 방정식이었다.  얼치기 개혁과 포장만 진보인 세력의 퇴장은 시대적 요청이다. 아닌 자들은 살아남기를. 대통령으로서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최고 지도자의 존재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민심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타당하다.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자들,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로 정치하지 않는 자들은 이제 그만 두라는 요구는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과반에 이르는 민심이 택한 이명박 차기 정권이 과연 올바른 답인가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게 된다. 물론 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예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명박 차기 정권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노무현 정권이 깔아놓은 잔혹한 시장의 인프라 위에 태어난 권력일 수 있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차기 정권은 그 태생은 달리하지만 자본의 힘을 상전으로 모시는 데에는 목표가 동일하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실용정부"의 미래    더군다나 "실용정부"로 이름을 붙이겠다는 차기정권의 성격과 방향은, 그렇지 않아도 근본적 성찰이 절실한 이 사회를 더욱 몰가치적이고천박하게 만들어가지 않을까 우려된다. 노무현 정권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경향이 더욱 심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실용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걸 최고의 가치로 선정할 때 나타나게 될 철학의 부재가 염려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판적 자기 성찰의 능력을 갖지 못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실용 위주의 사고는 목표에 대한 윤리적 논쟁과, 수단과 방법에 대한 가치판단을 최대한 배제해버린다. 내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는가 아닌가에만 주력하는 이기적 사고태도이다. 바라는 것이 탐욕인가 아닌가가 문제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이 정의로운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않다.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자세는 타자에 대한 배려나, 옳고 그름의 문제를 가볍게 여긴다. 그건 자칫 매우 무서운 사회로 전락하는 첩경이다.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주제 하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즉, 이제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지점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인 민생을 해결하는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차원 높은 품격을 쌓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깊고도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이념이나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생생해지는 문제다. 물질이 최고의 절대적 존재가 되는 물신(物神)의 현실에서 사람의 위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 치열하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과 그래서 잃어가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가 과연 어떤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표류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돈 독이 올라 난장판이 되는 사회가 되어도 이에 윤리적 제동을 걸 힘도 없고. 그 판에 끼지 못하는 것이 곧 인생의 실패라는 생각들이 지배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인간 서로에게 이리가 되는 상황을 막아낼 수 없다면, 그건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는 사회로 질주할 뿐이다.  역사를 미래지향적으로 바꾸어 보려는 이들에게 이번 대선의 결과는 패배나 상실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잘못된 뿌리가 내렸는지를 깊이 성찰하고, 무슨 생각을 하나씩 모아나가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너무나도 소중한 역사의 소중한 교사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집어 들어야 할 것들    그간 혹여 손에서 놓았던 역사와 철학을 다시 집어 들어야 한다. 정치경제학의 논쟁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진로에 대해 격론을 벌어야 한다. 국제 외교사의 맥락을 깊게 짚어 오늘의 현실을 진단하고 내일의 구상을 새로이 짜야 한다.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희망과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놓고 함께 고뇌해야 한다. 인문주의 운동과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하나가 되는 "향연"을 베풀어야 한다. 자연과학이 인문학과 창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잔치를 여기저기서 즐겁게 꾸며야 한다. 자기성찰의 능력을 기르는 사회 전체의 교육적 환경이 변할 수 있도록 도처에서 바람이 불어야 한다.  유독 지식인들의 침묵이 두드러졌던 이번 대선을 겪으면서 이젠, 피상적 논쟁이 아닌 심층적 논의가 절실한 시기임을 누구나 뚜렷이 감지할 것이다. <프레시안>은 그걸 위해 훌륭한 현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나눌 수 있는 방송매체에서의 프로그램 기획과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도 열망된다. 우리에게는 이제 역동적인 대화를 통해 대안의 실체를 이루어낼 새로운 과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을 일구어내는 힘은 정작 권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민심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희망의 <향연>    자기성찰이 부족한 시대는 언제나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시대의 비극을 되풀이 할 수 없다. 자기 철학이 분명한 사회,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매일 길러나가는 그런 일상을 우리는 꿈꾼다.    "근본적인 성찰", 그건 여유 있는 자들의 한갓진 사치가 결코 아니다. 시간이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의 행복은 종국에는 무너진다는 절박감의 토로이다. 좋은 미래는 그런 인식에서 비로소 만들어 질 수 있다. 역사는 쉽게 진전하는 것도 아니지만 쉽게 후퇴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희망의 향연>이 우리의 결심 여하에 따라 도리어 새롭게 시작되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김 민웅 목사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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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선한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좁은 길이라도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힘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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