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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앙의 멘토 김준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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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희 작성일13-02-19 17:08 조회3,4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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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싱가포르에서 국제대학생선교회(CCC) 동아시아 대표로,

그리고 East Asia School of Theology 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정인수 선교사가

2007. 12. 11.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런 모습을 닮았으면, 그리고 이런 영향을줄 수 있는 신앙과 생활이었으면

바라는 마음에서 옮깁니다.         (옮긴이  김 준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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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성시화운동 총재이자 한국대학생선교회(KCCC)의 설립자이신 김준곤 목사님과의

처음 만남은 1969년 이뤄졌다. 그분이 쓴 만남이라는 초청글을 통해서였다. "인생은 세 개의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첫 만남은 사랑의 눈동자 속에 만나는 어머니와의 만남입니다…."

3선 개헌 데모로 소용돌이치던 1969년, 나의 대학생활은 혼란스러웠다. 고등학교 때 불교 학생회 룸비니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외우며 좌선도 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그 혼란의 대학생활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만났다. KCCC를 통해서였다.

따라서 KCCC는 영혼의 고향이 되었다. 또 이곳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소중한 만남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처음 멀리서 보았을 때 김 목사님은 꿈을 먹고 사는 분이었다. 아직은 한국 기독교 인구가 200만명을 조금 넘었고

교회에서 대학생 보기가 흔치 않은 때였다. 김 목사님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민족 전체의 복음화를 꿈꿨다.

우리 젊은 대학생들에게도 민족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갖도록 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주 안에서 꿈을 꾸는 분이 김 목사님이다.

사실 세계선교의 꿈을 꾸고 동아시아가 세계선교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내 비전은 그 분의 영향이다.

나는 김목사님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김 목사님으로부터 무척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는 특권이었다.

특히 지도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다. 비전이 크면 이루어가는 과정에 고통도 많고 지불할 것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느날 오후 김 목사님과 마주 앉았다. 당시 많은 도전이 우리 앞에 있었다. 도전은 먹구름으로 변했고

마침내 폭우가 돼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김 목사님은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하셨다.

 "비가 쏟아지는 저 먹구름 위에서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어려운 도전 앞에 설 때마다 의(義)의 태양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도와 주었다.

곁에서 바라본 김 목사님은 눈물이 많은 분이다. 주님을 향한 눈물과 민족의 아픔 속에 쏟는 눈물을 늘 흘리셨다.

금식도 자주 하셨다. 그분의 기도에는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전사와 같은 비장함이 있었다.

1990년대 어느 날 북녘 땅이 손에 잡힐 것 같은 두만강 가에서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목사님의 눈물을 보았다.

어렵게 숨어사는 탈북가족들을 돌아본 후 우리는 같이 울었다.

나도 목사님을 따라가는 모양이다. 사역의 연륜이 조금씩 더해가며 눈물이 많아진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김목사님의 눈물이다. 이 눈물은 슬픔을 상징하는 눈물이 아니다.

김현승님의 눈물이라는 시처럼 "흠도 티도 없는 것, 가장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오면 눈물을 드리겠나이다"라며

주님 앞에 드리게 되는 그런 눈물이다.

많은 것을 목사님 곁에서 배우고 그래서 닮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도저히 그대로 닮을 엄두가 안 나는 것이 있다.

열정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비전 성취에 대한 열정 말이다.

70회 생신을 맞으신 날, 우리 제자들이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식사시간에 주인공이신 목사님께 잠시 시간을 드렸다.

그랬더니 40분에 걸쳐 민족복음화를 설교하시는 것이 아닌가!거기 모인 제자들이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들었을 메시지였다.

그분은 나이가 드셔도 열정만큼은 여전한 것이었다.

한편으론 이제 연세가 드셨구나…싶었다. 얼마나 한 맺힌 민족복음화였으면 그러셨을까?

전할 말씀이라면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듯이, 그날 모인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들은 말씀이었는가는 상관없이,

민족복음화를 외치시는 그 열정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목사님의 그 열정을 생각하면

우리는 게을러지고 싶어도 게을러질 수가 없는 것이다.

목사님을 기억하면 추상같이 책망하시던 모습과 더불어 소년같이 티없는 미소가 생각난다.

목사님은 이 미소를 통해 늘 내게 격려하셨다. 나는 그 미소 속에서 눈물로 주님을 사랑하는 법과

눈물로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목사님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하셨다. 멘토이자 아버지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1984년 김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던 내 큰딸이 며칠 전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도 누구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만큼 살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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