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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촌 희망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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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08-01-27 19:14 조회3,2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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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쪽방촌 광야교회














     절망촌 희망교회 이야기 - 영등포 쪽방촌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 주말에는 날씨가 추워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날이 추워지면 밖에서 일하시는 분들 고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고,무엇보다도 지하철역에서 노숙하는 분들 걱정이 앞서는데요. 영등포역 주변의 노숙인들을 20년째 돌보고 있는 분이 있죠.광야교회 임명희 목사. 임 목사는 술, 폭력, 매춘으로 알려진 쪽방촌에 맨손으로 들어와서 교회를 세우고 노숙자, 행려병자, 윤락여성, 전과자, 장애인 등이렇게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했습니다. 처음엔 멱살을 잡히고 깡패들한테 몽둥이로 맞으면서도 그들에게 밥을 주고, 아픈 곳을 만져주고, 재워주고, 상담해주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줬습니다. 영등포 쪽방촌에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찾아간 ‘사랑의 전도자’ 임명희 목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1월 1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영등포 밤거리의 화려한 불빛 뒤편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죠. 일명 쪽방촌...술, 폭력, 매춘으로 알려진 곳인데요. 노숙자, 행려병자, 윤락여성, 전과자, 장애인 등 어디 오갈 데 없고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20년째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한 노숙자를 만나면서 운명처럼 영등포 쪽방촌에 교회를 세운 임목사는예배 중에 멱살을 잡히고 깡패들한테 몽둥이로 맞으면서도 도리어 그들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갔는데요. 그들에게 밥을 주고, 아픈 곳을 만져주고, 재워주고, 상담해주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줬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치료하는 유일한 힘은 ‘능력의 하나님과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영등포 쪽방촌에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찾아간 ‘사랑의 전도자’ 임명희 목사의 파란만장한 구원의 순애보! 1월 10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쪽방촌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 ▶ 주말부터 추워진다고 하는데 요즘도 노숙자들이 많은가요? 어제 저녁에도 나가서 노숙자들에게 라면을 나누어주었는데 역사에서 매일 80명~100명이 잠을 자고 있어요. 이들은 이렇게 추운 날씨를 이겨낸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죠. 다른 데 가지 않고 역에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 순찰도는 게 하루 일과이신가 봐요. 예, 거의 매일 순찰조가 순찰을 돌고 있어요. 역전을 돌기도 하고 역 너머에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도 몇 사람이 자고 있어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동사할까봐 밤마다 돌고 있죠. 또 몸이 약한 사람들은 새벽에 급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교회로 데리고 오는데 어제도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불 피워주고 잠도 재워주었어요. ▶ 광야교회가 어디에 있는 곳인가요? 영등포 역 바로 옆에 있어요. 영등포역을 마주보고 서서 오른쪽이거든요. 이곳은 자유당 시대부터 형성된 윤락촌이에요. 6.25 사변 직후에 형성된, 아주 조그마한 방들이 쭉 연결돼 있는데 옛날에는 판자촌, 하코방이라고 불렀죠. ▶ 지금은 영등포가 세련되고 정리정돈이 잘 된 도시로 보이는데 아직도 그늘진 곳이 있어요? 겉에서 보면 아무도 몰라요. 역사 앞 도로를 달리면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 와서 보신 분들은 이 앞을 그렇게 다녔는데 이렇게 다른 세계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 철거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철거 이야기는 제가 그 동네에 들어갔을 때부터 돌고 있었어요. 그 동네에 들어가 살면서 크게 3번 정도 철거를 했어요. 그때 쪽방촌에 1천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돼서 개인 세대를 기준으로 500명 정도가 살고 있어요. 윤락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3,40명 정도 되고 거기서 생활하는 장애인과 노인들이 220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건설 일용직, 수세미를 판다든지 잡부로 나가는 사람들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어요. 또 아픈 사람들도 많죠. ◇ 무료급식 3끼, 하루 평균 900명 ▶ 그러자면 광야교회의 할 일이 굉장히 많겠어요? 우리가 쪽방상담소가 있고 이분들이 사는 쉼터가 있어요. 이 쪽방상담소에서 500여 세대를 돌보고 있는데 쌀이 떨어지면 쌀을 지원해 주고 목욕해야 한다고 하면 목욕시켜 드리고 방 도배나 청소가 필요하면 또 지원해 주고 있어요. 그리고 종종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겨요.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실 때도 혼자 가시는 거예요. 영안실에 누워있지만 경찰이 가족들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안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혼자 쓸쓸하게 누워있는 걸 보면 제가 마음이 너무 아파요. ▶ 차라리 그분들에게 물고기를 줄 게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서 자력갱생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세상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과학화, 첨단화 시대를 가고 있는데 이분들은 스스로 변화하는 세대에 적응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일반적인 직장생활이나 여건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이고 몸은 병들고 가슴에는 분노와 외로움과 절망이 담겨있어요. 자기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사회복지가 상당히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분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기까지는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어요. 절대 극빈층이죠. ▶ 광야교회 교인은 얼마나 되나요? 주일에 예배드리는 사람은 230명 정도이고 교회 내 쉼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남자들은 100여명, 여자들은 20명 정도 해서 120~130명이 살고 있어요. ▶ 무료급식을 하고 계시죠? 무료급식 하는 것도 큰일이에요. 서울역이나 용산역 등 다른 곳에 배식하는 곳도 많은데 우리는 하루에 3끼를 배식해요. 요즘 아침에는 300명 정도가 와서 먹고 낮에는 400명 정도, 저녁에는 200~250명이 와서 먹으니까 평균 900명이 와서 먹는 거죠. ▶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정말 정실하겠어요. 자원봉사자가 두 부류에요. 한 부류는 노숙자로 와서 변화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봉사자가 있고 또 한 부류는 외부에서, 은행이나 일반 회사에서 와서 봉사해 주는 사람들이 있죠. ◇ 무법천지 영등포, 1년만 버텨도 기적이야 ▶ 광야교회를 처음 세우신 게 언제인가요? 약 20년 전인 1987년인데 그때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하고 험악했죠. 사람들이 스스로 무법천지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까요. 밤낮없이 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밤에는 특히 윤락이 성행했는데 기둥서방들이 설치고 다녔어요. 당시 기둥서방을 삼촌이라고 불렀는데 삼촌 한 번 부르면 여기저기서 뛰어나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밟아버리는데 거의 초죽음이 돼서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 그렇게 열악하고 험악한 곳에 교회를 세우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청량리에서 전도를 하다가 노숙인을 만났어요. 노숙인들에게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영등포 옆 골목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들이 쌀과 생필품을 몇 개월 동안 준비해서 찾아갔는데 그때가 87년 9월이었어요. 동네에 들어갔는데 저도 어렵게 살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동네는 생전 처음 봤어요. 서울 하늘 아래에 이런 곳이 있다니 깜짝 놀랐어요. 거리 사방 좌우편에 사람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빛이 없더라고요. 여기 저기 모여서 술판 벌이고 술 먹고 있고 포장마차에서 싸우는 소리, 또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쪽방에 들어가 보니까 그 작은 방에 몸이 아픈지 끙끙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제가 자주 불렀던 찬송이 있는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찬송이에요. 이 찬송을 부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목회가 잘 안 될 곳, 전도가 잘 안 될 곳, 헌금이 잘 안 나올 곳, 그리고 목회하다가 죽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이 있었어요. ▶ 주변에서는 그곳에서 1년만 버텨도 기적이다, 한 명만 변화시켜도 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으셨다고요. 그 말은 ‘미나미’라는 사람이 한 이야기인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본인 말로 똘마니 44명을 거느리고 소매치기를 가르쳤던 소매치기 왕초에요.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 전철을 타고 다니고 자기는 평생을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못된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해요. 그러면서 당신도 여기에 와서 1년도 못 버티고 두들겨 맞고 나갈 거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별 짓거리를 해도 한 놈도 사람이 안 됐는데 새파란 당신이 와서 어떻게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느냐고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 거예요. 그때 그 말을 한 거죠. 당시에 제가 30살이었거든요. ▶ 전과가 있는 분의 도움으로 3평에서 시작을 하셨다고요. 미나미가 자기가 살고 있는 쪽방 말고 1평짜리 쪽방을 하나 더 갖고 있었어요. 자기한테 잘 대해주니까 약간 마음이 움직였나 봐요. 당신, 여기서 교회 하고 싶냐고 물어보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내가 지금까지 못된 짓만 하고 살았는데 마지막에 죽기 전에 좋은 일 하는 셈치고 시가로 70만원이지만 싹둑 잘라서 12만원에 팔 테니 사라고 하더라고요. 화투를 쳐서 빚진 게 12만원이었던 거예요. 그 쪽방을 사고 옆의 공터를 허물어서 전체 3평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3평짜리 예배당이 탄생한 거죠. 첫 예배를 7,8명 정도가 모여서 본 것 같아요. ◇ 온갖 테러와 협박, 멱살 잡히는 건 다반사 ▶ 스스로 ‘야인시대의 협객목사’라고 하시는데 그때부터 험난한 목회생활이 시작된 거로군요. 제가 협객목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병들고 술 마시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어요. 와서 밟아버리고 때리고, 그런 경우에 제가 나서서 말리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주니까 사람들이 협객 목사라고 하기도 하고 건달이라고 하기도 하더라고요. ▶ 연탄 테러, 식칼이나 몽둥이로 위협도 당하시기도 하고, 심지어 교회가 불타기도 했다고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식칼을 가지고 와서 베니다 판으로 된 문짝을 콱 찍어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놓는 거예요. 주변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그랬더니, 예배드리고 있는 저 사람들 다 죽여 버리려고 그런다고 해요. 나하고는 아무 이유가 없는 데도요. 그때 6명이 조그만 방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문 찢고 들어와서 칼로 찌르면 꼼짝없이 당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할머니가 와서 말리고 조금 있다가 친구가 와서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둘이서 실랑이를 벌이더라고요. 다행히 그 친구가 칼 든 놈을 잡아서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위기를 면했는데 말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그때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죠. 그리고 교회가 불탄 일은 당시 동네 포주 두목격인 하야시라고 있었는데 미나미와 쌍두마차로 동네를 주름잡던 사람이에요. 이 하야시한테 춘희 삼촌이라고 불리는 동생이 하나 있어요. 이 양반이 완전히 알코올 중독자라서 술 마시고 싸움질하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이 사람의 행패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해요. 어느 날 하야시한테 전도를 하니까 동생을 가리키면서 저 놈한테나 전도하라는 거예요. 저 놈 사람 만들면 나도 교회를 나가겠다는 사인을 줘요. 그래서 춘희 삼촌을 전도하기 시작했어요. 거리에서 술 마시다가 쓰러져 있으면 데려와서 잠재워주고 술 끊게 하려고 같이 영종도 섬에 들어가서 낚시도 하고 강원도에도 가서 냇가에 며칠 머물기도 했어요. 이런 노력들이 통했는지 갔다 오면 괜찮아져요. 그렇게 괜찮아졌을 때 이 양반이 말하길, 내가 이렇게 망가진 사람을 교회에서 돌볼 테니까 나를 믿고 같이 동참하게 해달라고 해서 쪽방교회에 다른 노숙자들과 함께 숙박을 할 수 있게 해 줬어요. 그러다가 교회 안에서 술 마시고 치고 박고 싸움이 난 거예요. 그런 와중에 난로 켜놓고 싸우다가 난로를 차버렸어요. 그래서 난로가 엎어지면서 판잣집에 불이 붙으니까 순식간에 타면서 옆으로 몇 채를 태워버렸어요. 결국 저는 동네 사람들한테 끌려가서 이럴 줄 알았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여자들은 달려들어서 때리기도 하고 원성이 자자했어요. ▶ 그런 일을 당하시고도 사명감 때문에 그곳을 안 떠나신 거예요? 그럼요. 저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맡겨주셨다고 믿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묵묵히 해나간 거죠. 포주나 술집 이런 사람들에게는 교회는 들어오면 안 되는 그런 존재였어요. ▶ 그래서 멱살 잡히는 일은 다반사였겠어요? 여자들한테도 잡히고 남자들한테도 잡히고 늘 잡혔어요. 그 동네에 아바우 패거리들이 있는데 질이 아주 안 좋은 조직의 실세들이에요. 늘 그 사람들한테 멱살 잡히고 둘러싸여서 맞기도 하고 그런 경우를 3년 가까이 견뎠어요. ▶ 3년 정도 되니까 그 사람들이 변하던가요? 3년쯤 되니까 동네 위로 영등포 고가도로가 생겼어요. 그게 나면서 도로 밑 부분은 일부 철거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들이 살던 집들이 뜯겨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동네를 뜨게 된 거죠. 철거되면서 여러 명이 동네를 떴어요.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저를 때리면서도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지켜봤더라고요. 맞으면서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를 했는데 그 중의 리더가 동네를 떠나기 전에 술을 잔뜩 마시고 저를 찾아왔어요.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죠. 내가 당신한테 졌다고 그래요. 무슨 이야기냐고 했더니,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진짜라고 해요. 무슨 아파트 입주권이나 따러 들어온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당신한테 감동받았다면서 다른 곳에 가면 교회를 나갈 거라고 그러면서 동네를 떠났어요. 그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 정말로 교회를 나가는지는 모르지만요. ◇ 어릴 적 가정환경은 영등포 생활의 연습무대 ▶ 험한 일을 자청하신 걸 보면 어린 시절도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고향은 전남 진도의 조도라는 섬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바람과 하늘과 대자연속에서 산거죠. 제 나이가 51살이니까 50년 전 진도는 아주 외진 곳이었어요. 아버지는 나중에 알콜 중독자가 되셨는데 동네에서 호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힘도 좋고 동네 사람들과 자주 싸우기도 하셨지만 싸워서 진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얼마나 엄하셨는지 제를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아서 철사로 때리기도 했어요. 제가 워낙 개구쟁이라서 손만 대면 뭐든 부수는 거예요. 가끔 싸움도 하고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늘 맞았어요. 그런 아버지가 나중에 알콜 중독자가 되셔서 온 가족을 힘들게 하셨어요. 또 어머니는 폐결핵에 걸리셔서 기침 때문에 일도 못 하시고 형은 소아마비라서 가정이 굉장히 어려웠죠. 왜 가난한 사람이 많을까, 왜 아픈 사람이 많을까, 왜 형은 장애자가 되었을까, 왜 아버지는 술 마시고 무서운 사람이 되었을까, 어디에도 말 못할 것들이 가슴에 쌓인 거예요. 그런 환경이다 보니까 아픔과 분노와 어두움이 저에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린 시절부터 가정환경이 영등포의 상황을 연습하다시피 살아온 거죠. 자라면서 그 세계를 거친 거예요. ▶ 신앙과 가까워지신 건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제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술 마시고 여전히 어머니와 형을 때리는 거예요. 제가 중간에 서서 말렸는데도 여전히 때리고 너는 뭐냐고 하시면서 저도 때려요. 그래서 집 안의 평화를 위해서 아버지를 제거하겠다고 곡괭이를 가지고 아버지 목을 노리면서 찔렀어요. 아버지는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한 거죠. 한 번 맞으시더니 뒤로 벌렁 넘어지시더라고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끼를 들고 집을 때려 부수겠다고 기둥을 찍어 내렸어요. 그때 쓰러져 계셨던 어머니가 옆에 오셔서 ‘아가,아가, 정신 차리라고 너까지 이러면 되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아버지도 쓰러져 계시고 집도 부서져 있고 난장판이 되어 있더라고요.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왔다가 저를 말리면서 아버지가 저러는 게 한두 번이었느냐고 참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결심한 것이 절에 들어가야겠다, 부모님이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어서 이렇게 세상을 사시는가 보다, 내가 절에 들어가서 그 업보를 달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날 목포에 있는 누나 집에서 며칠 동안 지내면서 어느 절로 갈까 고민하면서 속세를 떠나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서 회포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퉁퉁 부어가지고 누나 집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런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게 보이더라고요. 젊었을 때 어떻게 하든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쳤는데 절망 속에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을 좀 안정을 시켜드리고 절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나네 집 옆방에 돌팔이 한의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무당 아들이에요. 이분한테 아버지의 처방을 맡겼는데 진맥하다가 나를 부르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분이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의 진맥을 해보니까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야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무당 아들이 절에 가라든지 굿을 하라든지 그래야 맞는데 교회에 나가라고 하니까 깜짝 놀랄 수밖에요. 어쨌든 아버지도 교회 나가시겠다고 하시고 고향인 조도에 개척교회가 생겨서 그곳에 모시고 다녔는데 저는 순전히 아버지가 교회에 잘 나가시게 할 목적으로 같이 모시고 다닌 거예요. 마침 부흥회가 있어서 하루에 3번씩 예배를 참석했는데 마지막 새벽 예배 때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주님을 실컷 불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새벽 캄캄한 시간에 바닷가에 가서 목이 터져라 불렀더니 주님이 저를 찾아와서 만나주셨어요. 거기서 제가 그토록 찾고 찾았던 사랑도, 평화도, 행복도, 희망도 찾았어요. 그래서 절에 들어가려던 생각을 바꿔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어요. 나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된 겁니다. ◇ 영등포에서 시작한 ‘선한 사마리아인’ ▶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신 건 몇 살 때였나요? 제가 영등포에 들어간 게 30살 때였는데 저는 그때 중국 선교를 나가려고 했어요. 제일 인구가 많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려고 했는데 영등포 동네 상황을 보고 의분을 눈물을 흘렸어요. 대형교회가 한국에 다 몰려있는데 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지 않았는지 의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누가복음 10장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더라고요. 네가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말씀을 주셔서 그때부터 영등포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당시에 직장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모든 걸 부여해 주셨어요. 그 하나님을 믿고 시작한 겁니다. ▶ 절망촌 희망교회 이야기, 영등포 쪽방촌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님의 이야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 한 달 동안 먹은 라면...공깃밥 놓고 울어 ▶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섬에서 졸업했고 아버지를 도와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제가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대신 공부 잘 하는 건 꿈도 못 꿨고요. 그러다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담배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 길에서 깡패한테 쫓기던 여학생을 구해 준 적이 있어요. 이걸 계기로 그 여학생과 친해져서 같이 놀고 집에도 데리고 오고 하니까 그 소문이 누나한테 들어가고 누나가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저를 교무실로 부르시더니, 아버지는 시골에서 가난한 와중에 너를 공부시키겠다고 고생하고 계시는데 네가 이러고 다니면 되겠느냐고 정신 차리라고 뺨을 때리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정신을 차리고 이성을 사귀는 건 자제했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가난 때문에 당장 공부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공부하리라, 대학을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어요. ▶ 신학교는 어떤 상황에서 가게 되신 건가요? 제가 29살 때 신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돈도 없고 누가 학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지만 중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고 중국어도 공부하면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들어간 겁니다.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학력고사를 준비하려고 서울에 올라올 무렵이 28살 때였어요. 그때 목포에서 아내를 만났는데 아내가 학비를 대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기일 내에 안 올라와서 한 달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갖고 올라온 돈이 12만원이었는데 한 달 지나니까 없어져버리더라고요. 돈 가지고 올 줄로 기다리다가 라면으로 한 달을 때우는데 뱃속에서 라면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밥이 그렇게 먹고 싶은 거예요. 당시에 공깃밥이 350원이었는데 돈을 다 털어서 시장 통에 가서 공깃밥을 시켜놓고 못 먹고 울었어요. 그때 봤던 쌀 한 톨이 얼마나 귀중하게 보이던지요. 그리고 주인이 밥을 수북하게 주면 좋은데 숟가락으로 누르면 쑥 들어가 버려요. 배는 고픈데 밥 양은 적고 얼마나 밥을 맛있게 먹었는지 몰라요. 제가 이렇게 밥 못 먹고 고생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노숙인들이 하루에 900명 정도가 와서 밥을 먹잖아요. 그래도 외국 수입쌀도 아니고 정부미도 아닌 일반 쌀로 압력밥솥에 지어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을 원 없이 먹고 싶은 만큼 대접하고 있어요. 그리고 신학교 가기 전에 학력고사 준비하느라고 학원을 다녔는데 제가 학원 내에 전도를 많이 해서 1개 소대 병력만큼 전도해서 근처 교회를 나갔어요. 그런데 저 때문에 학원이 시끄러워진다고 누가 원장님한테 이야기하는 바람에 학원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한 달 후면 시험을 보니까 그동안 이 예배당에서 밥 달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까 잠만 자고 공부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나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면 목사가 될 사람인데 나중에 목사가 되면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결심했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항상 개방이 되어 있어서 100여 명 이상이 잘 수 있도록 해놨어요. ▶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잘 헤쳐 나오신 것 같아요. 저에게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버티는 걸 잘해요. 어떻게 길러졌는가 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거든요. 나뭇가지가 한가득 쌓인 무거운 지게를 지팡이 하나로 버티는데 그걸 통해서 버티기를 배운 것 같아요. 그리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살다 보니까 그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견뎌야 한다는 걸 배운 거죠. ◇ 아내와 아이들도 괴롭힘 당해... 특히 아이들에게 미안해 ▶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제가 27살 무렵에 목포에서 교회 다닐 때 아내를 만났어요. 당시에 아내는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저를 좋게 본 거예요. 그러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마침 아내를 만나서 학비를 대주겠다고 하니까 고기가 물을 만나게 된 셈이죠. 물론 약속이 지켜진 것 아니었지만요. ▶ 결혼은 언제 하신 거예요? 88년 12월 31일에 결혼했어요. 그때 ‘나는 30살이 넘어가면 결혼 안 할 테니까 30살 넘기기 전에 결혼하자’고 해서 12월 31일에 결혼했어요. 영등포 쪽방촌은 아내와 결혼하기 전부터 전도를 다녔고 결혼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동네에 들어와서 살면서 아이들도 낳고 복음을 전했어요. ▶ 사모님을 내 마누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면서요? 동네에 가서 보니까 제 옆에 서 있는 아내를 보고 하룻밤 자면 얼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 사람은 내 아내라고 했더니 안다고, 알지만 이야기하는 거래요. 그런 사람과 골목에 들어가서 둘이 폼 잡았던 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아내를 자기 마누라라고 하면서 쌍칼차고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네 마누라는 내 마누라로 하고 너는 내가 다방에서 사귀었던 마담과 같이 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칼을 확 뽑아들고 쫓아오면 엉겁결에 저는 도망가요. 도망가다가 찬스를 봐서 그 사람을 순간적으로 제압하고, 그렇게 몇 번씩 부딪치곤 했어요. ▶ 사모님이 더 이상 여기에 못살겠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는 말씀은 안 하셨어요? 집사람이 의지의 사람이에요. 잘 견뎌준 것에 감사해요. ▶ 자녀들은 어떻게 되세요? 모두 3명인데 애들한테 빚이 많아요. 애들이 이야기를 하면 제가 꼼짝을 못 해요. 거기에서 아이들이 살면서 그 동네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서 자랐잖아요.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는 경우에 아이가 모르니까, 엄마도 돈이 없으면 다른 아줌마들처럼 아저씨 데리고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한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싸우는데 한 녀석은 칼 들고 나오고 또 다른 한 녀석은 망치를 들고 나오는 걸 보고 질겁했죠. 그리고 애들이 8살 이전에 담배를 경험했어요. 맹모삼천지교라고 아이들은 본 대로 하는 거죠. 아내나 저나 애들한테 이런 환경 속에서 살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애들을 이용해서 저를 위협을 해요. 교도소 출신들이 거칠잖아요. 어느 날 4층 옥상 난간에 애를 앉혀놓았는데 그 정도 높이면 마침 떨어져 죽기 딱 맞는 높이거든요. 거기에 애를 앉혀놓고 나를 부르는 거예요. 그 놈이 애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더라는 말을 듣고 쫓아올라갔죠. 가서 보니까 애 있는 곳까지 거리가 꽤 멀어요. 아이가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떨어질 것 같아서 제가 소리를 못 질렀어요. 잠자리 잡을 때 살금살금 다가가잖아요. 그렇게 다가가서 애를 안았더니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더라고요. 술 마시고 앉아있는 그 놈을 보니까 안에서 분노가 폭발하는 걸 느꼈어요. 살의까지 느껴지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고 살면 되겠느냐고 뭐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랬더니 그런 짓을 한 거죠. 아이들이 저도 모르는 곳에서 다방면으로 그런 일들을 당했더라고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워낙 동네에 일이 많으니까 정작 제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 지금은 다들 성장했겠어요. 20살이 된 첫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준비하고 있고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 18살이고, 셋째가 15살이니까 중학교 3학년이 됐어요. ▶ 이제는 부모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겠어요. 처음에는 애들이 싫어했는데 이제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아빠, 엄마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교에서 주는 장한 아버지상에 초청해서 상을 받은 적도 있어요. ◇ 사랑의 텔레파시, 물자공급은 하나님께 맡겨 ▶ 무료급식을 하루에 900명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경비는 어떻게 충당하시나요? 영국의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 목사님처럼 저도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어요. 당장 먹을 쌀이 없으면 어떤 분을 통해서 쌀을 갖다 줍니다.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봉투를 주는데 그 안에 쌀을 살 수 있는 수표가 들어있어요. 누구시냐고 물으면 묻지 말고 그냥 쓰래요.또 어떤 때는 시골 정미소에서 쌀을 한 트럭 갖다 주기도 하고 떨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유지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IMF 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어요. 시장에 나가서 시래기를 주워서 국 끓여먹고 김치 담가먹었는데 아내가 그 일을 열심히 했어요. 한 번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때문에 일 하던 도중이라 그만둘 수 없어서 다 젖어버렸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열심히 일을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참 귀한 사람이에요. ▶ 가장 보람을 느끼실 때가 언제인가요? 포주 했던 사람이 술 마시면 옷 다 벗어버리고 싸움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포주를 그만두고 술도 끊고 신앙생활 하는 게 보람이고 열매에요.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전과자들, 깡패들, 알코올 중독자들은 변화가 안 된다고 말해요. 어제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사람인데 하야시 동생 춘희 삼촌이 대접에다 술 7병을 따라 마시고 죽었어요. 이 사람을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려요. 제가 7,8년을 노력했던 것들이 아무 열매 없이 죽어버리니까 마음속으로 쌓아올렸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동네 건달이 이야기하기를 이 사람들은 절대 변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변화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전과 27범도 변화가 돼서 사람이 됐어요. 이 사람은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때리고 조직에 들어가서 조직의 명령으로 사람을 죽이고 이후 소년원에 들락날락하면서 전과가 많아진 사람이에요. 알콜 중독에 거의 폐인이 되어서 우리 교회에 왔는데 와서도 얼마나 문짝을 때려 부수고 행패를 부렸는지, 제발 다른 곳으로 보내라고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도 인간 안 될 사람한테 묘한 집착이 생겨요. 그래서 사람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그때 41살이었는데 고등학교에 보냈어요. 2년 코스로 공부하고 졸업을 하는데 졸업식장에서 소감을 이야기하라고 하니까, “목사님, 쪼그만 애들하고 공부하느라 쪽팔려서 혼났어요.” 그러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신학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밤에는 순찰대장을 맡아서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 노숙자들의 참된 쉼터 ‘홈리스 복지센터’ ▶ 그렇게 염원하시던 ‘홈리스 복지센터’가 지난해 7월에 완공이 되었다고요? 홈리스 복지센터 위치는 영등포 쪽방촌 내에 있고 크기는 지하1층에서 지상6층으로 별로 크지 않아요. 이분들이 사는 집을 지은 거니까요. 270평으로 평수는 크지 않은데 이분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집을 지어준 것이, 정부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민간인의 힘으로 영등포 그 비싼 땅에 홈리스들을 위한 집을 지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겁니다. 이 일 때문에 미국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는데 국내외 지원으로 만들어졌어요. ▶ 화요일에 ‘역전 자정 예배’를 드리신다는 데 노숙자들이 많이 참석하시나 봐요. 왜 자정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그 시간이면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전철도 끊기고 나면 역전 노숙자들이 잠을 자기 위해서 자리를 잡는데 그걸 보면 너무 불쌍해요. 방탕과 노숙에 중독이 되어 있어요. 노숙도 일종의 중독이거든요.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한테 빵만 줘서는 안 된다는 거죠. 구걸하는 부분만 키워주게 되고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 많아요. 그래서 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치료해줘야 하고 옮겨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밤에 나가서 일일이 다 만나는 겁니다. ▶ 노숙인들 중에서 서로 의지가 돼서 결혼하신 분들도 계시죠? 결혼식을 한 분들이 25쌍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물론 다 순탄하게 가정을 꾸리는 건 아니지만 가정을 잘 꾸리시는 분들은, 직장을 나가시는 분들도 있고 세탁소 나가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고 직장에 취직해서 일꾼으로 장기근속하면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 상담을 해보시니까 노숙자들이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던가요? 그들의 공통점이 부모님 세대의 가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에요. 편모나 편부 슬하, 치고 박고 싸우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내면세계가 건강하지 못해요. 본인이 성장해서 가정을 이뤄도 결속력이 약해서 충격을 가하면 깨지기 쉬워요.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노숙자가 쪽방촌으로 들어오게 되고 꿈이나 비전이 없죠. 그러다 보면 절망상태에 빠지게 되고 자신을 길에다 던져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노숙자가 되는 겁니다. 여성노숙인들은 약간 정신적인 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피해망상, 과대망상, 우울증, 편집증 등 대인관계에 좀 문제가 있어요. ▶ 홈리스 복지센터에 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겠죠? 이번 달에 동네에다 청소년 쉼터를 마련했어요. 10명 정도를 수용해서 교육시키고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데 이걸 안 해주면 나중에 어른이 돼서 돌아다니다가 노숙자로 전락하고 마는 거거든요. 이 사회에 방치되고 있는 노숙인들을 보면서 청소년들의 교육과 같이 연결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발생한 노숙인들은 심신의 치료가 필요한데 이들을 위한 치료가 해야 될 일로 남아있어요. ▶ 홈리스 복지센터를 후원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의 한 말씀 해주세요. 참 고맙죠. 시간을 투자하는 것만큼 큰 게 없습니다. 한 번씩 오시는 분들은 하루 종일 계시거든요. 또 그냥 오시지 않고 어려운 홈리스들을 위해서 헌금을 보내주시는 분들, 20년 가까이 꾸준하게 돌봐주시고 봉사해주시는 분들에게 말할 수 없이 감사해요. ◇ ‘사랑의 파도치기’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사람의 힘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변화가 되지 않아요. 내가 땀 흘리고 노력하고 시간을 투자해도 변화가 안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사람들이 변화되더라고요. 제가 일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일을 합니다. 이런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좀 더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견뎌주었으면 좋겠어요. 성급하게 저런 사람들은 변화 안 돼, 도와줘 봤자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돌보게 되면 언젠가는 그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다를 보면 파도가 밀려와서 바위를 만지고 내려가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바위에 구멍이 난다는 겁니다. 이런 것처럼 사랑의 파도치기, 사랑의 어루만짐이 한결같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마음이 무너지고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걸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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