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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카토릭의 구원관에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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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늘사랑 작성일08-07-05 16:01 조회3,1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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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수녀의 비밀""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습니다.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재는 저의 일생에 가장 부끄러운 비밀입니다.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이야기 해 주십시오""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는 너무나 끔찍한 어둠만 있습니다."위의 글은 미국의 매스컴에 공개된 테레사수녀의 글(고백)입니다.미국의 주간지 Time이 테레사 수녀의 비밀(The Secret Life of Mother Teresa)이라는 글과, Newsweek가 신에 대한 의혹(The Dogmatic Doubter)이라는 글을 연이여 발표하자,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헌신하며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테레사 수녀를 성녀로까지 추앙하던 많은 그녀의 숭배자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습니다.구원과 사랑현대의 종교다원론자들은 예수님과 구원 대신에 평화와 사랑만을 이야기합니다.그래서 많은 인본주의자들도 종교간의 대화와 공존을 떠벌리곤 합니다.하지만, 그들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요일4:8),사랑이 곧 하나님은 아니라는 중요한 진리를 망각하고 간과하고 있습니다.공자도 맹자도 석가모니도 사랑(자비)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설파하는 사랑이란,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아가페)과는 동떨어진 인본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며,더더구나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사랑(선행)을 많이 베풀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주님의 넘치는 은혜(사랑)로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받은 은혜(사랑)을 나누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갈5:22)절간에 간 성가대얼마 전에, 양평의 某 사찰에서 큰 행사를 개최할 때에 某 성당의 성가대 수십명이 특별출연을 하여 축하의 노래를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사회자는 열띤 목소리로 "종교간의 평화와 우정,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하며,여러 차례나 감격스러운 어조로 종교간의 우정(불교와 천주교), 화합과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하기야, 불교와 천주교는 마치 형제와 같이 닮은 꼴입니다.사찰과 성당 안에 있는 수많은 성인(?)들의 형상(우상)들과 촛불과 뭔가(?) 나올 듯한 묘한 분위기!인간의 노력(선행,수행,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교리의 동질성!사제(신부)들의 손에는 묵주가 들려 있고 승려들의 손에는 염주가 있다는것이 다를뿐,그들은 똑같이 "신령과 진정"이 아닌 의식적인 주문(呪文)을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잘못된 구원관오래 전에, 성당에 다니고 있는 知人 중의 한 사람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구원을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그후에는 (오직) 심판이 있음"(히9:27)을 모르고 자신의 공로(기도)로 이미 지옥(연옥)에 빠져 있다는 사람을 끌어 올리겠다는 어리석은(무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성령으로 봉사하라테레사수녀가 평생 이룬 업적은 아무나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것이지만,만약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으로 봉사"한 것이 아니라면(딤후1:14),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더더구나, 그 선행은 하늘의 상급과 관계가 있는 일이지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지요.고난(환난) 중에서도 계속되는 은혜와 위로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은, 주님의 사도들이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를테면 사도 바울의 경우- 온갖 고초를 겪는 중에도,갖가지 곤욕을 당하고 착고에 채워져서 깊은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을 할 수 있었고(행16:25),극심한 고생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살 소망까지 끊어졌을 경우에도 오히려 주님의 위로와 소망으로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고(고후1장),야고보도 여러 가지 시험 중에 온전히 기쁨을 말씀하였고(약1:2),수제자인 사도 베드로도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할 수도 있지만,예수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소망으로 크게 기뻐한다고 선포합니다(벧전1:6~7).그런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훌륭한 사역을 수십년 간이나(평생동안) 헌신한 그녀에게-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그녀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없었다는 것은, 성경구절구절마다 언급하고 계신 주님의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와는전혀 동떨어진 불신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이방인의 공허한 외침을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람들로부터는 크게 인정을 받았지만 주님으로부터는 외면을 받아서주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간 상황은 혹시 아닌가하는 의심마저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누가 불법을 저지르는 자인가?불법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님께서 허락치 않으셨습니다.그때에 만약 바울이 자기 의대로 착한 일이니까 아시아에서 끝까지 사역을 고집했다면그는 성령님을 거역하고 근심시켜 드리며 불법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행16:6)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물론 선행(착한 일,의로운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가,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는 일입니다.주님께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해야 할 것을 엄하게 명하신 것입니다.(행1:8)그렇지않으면, 아무리 인간이 보기에 아름다운 행위라 할지라도비록 병 고치고 선지자노릇하며 구제에 힘쓸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주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나에게서 떠나가라"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7:23)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게 되면,"무엇이든지 (물론 주님의 뜻 안에서) 구하는대로 받고"주님 주시는 놀라운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고후3:17)오랜 광야생활에서도 끊임없이 내리는 만나(은혜)저도 양평의 수양관에서 "광야의 생활"을 체험하였습니다.외로움과 답답함, 곤고함, 궁핍함, 연약함, 피곤함, 괴로움 속에서 때로는 하소연하며 아픔을 주님께 토로하기도 했었습니다.그러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주님께서는 항상 "시험을 당해 죽겠다고 할 즈음에"임하시어 "신령한 노래"로 찬양하게 하셨고 또 풍성한 위로와 평안을 주셨습니다.(고전10:13)그것이 제가 광야생활에서 망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끔찍한 어둠(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기쁨과 소망을 회복하며 승리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때로는 극심한 환경 속에서 낙심하여,"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시13:1)"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부르짖어도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1~2)하며,좌절에 빠지는가 하였으나 곧 바로 이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를 노래했습니다."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13:6)"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22:22)율법인가? 은혜인가?몇해 전에 강원도에 있는 모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는 봉사자들의 얼굴에서는 기쁨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기계적인 ... 사무적인 ... 의무적인 ... 마지못한 ... 그러한 봉사를 느꼈습니다.구약의 제사에서, 성전의 기물들은 모두 기름칠을 하였습니다.그것은 모두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상징하는 것으로서,우리의 봉사(사역)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되,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율법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기름부음 안에서 기쁨으로 즐겁게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그런데, 성령님의 기름부음(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은 율법 안에 있게 됩니다.(갈5:18)그러므로, (테레사수녀의 고백과 같이) 목숨을 내놓고 봉사(구제)를 할지라도 평생을 끔찍한 어둠과 저주 안에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율법下에 있는 자는 항상 "저주 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갈3:10)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죄와 사망의 법)에서 속량(redeemed, rescued)하시고,십자가의 대속으로서 우리를 귀한 은혜(생명의 성령의 법)로 인도하셨습니다.(롬8:1~2)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사역(봉사,구제)보다 주님의 은혜(성령의 기름부음)안에 거하는 것이더 급선무이고 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적인 열심은넘쳐나지만, 생명과 평안은 없이 공허와 끔찍한 어둠속에 고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의보다는 인간의 의(선행)만 강조될 것입니다.오! 마리아여! 마리아여! - 공허한 외침마리아 제단을 차려놓고 열심히 공을 드려서 묵주(염주)를 돌리며 마치 불공을 드리듯,천상의 모후(하늘 어머니,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지칭하는 말)에게 경배하는 천주교인들을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서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있지만, 마리아만 부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없는 이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테레사수녀가 구원을 받았는가?하는 문제는 오직 주님만 아실 것입니다.주님의 구원은 물론 영혼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구원(돌보심,임재,신유,은사)을 포함합니다.그리고, 그녀가 이땅에서 이룬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그러나, 그녀가 혹 구원은 받았으되,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딛3:6)는 누리지 못하고,성령님의 인도(임재,기름부음) 가운데는 거하지 못했었구나 하고 짐작해 볼 수도 있습니다.또한, 우리는 그녀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삶(사역)을 비추어보면서"과연 우리가 주님의 은혜(생명,성령)안에 있는가를 되돌아보고  땀 흘려 수고하며 헌신하되, 항상 성령의 기름부음안에서 주님 주시는 소망 속에서 기쁨과 평안, 자유를 만끽하면서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가운데서끔찍한 어둠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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