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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말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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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준봉 작성일11-08-20 10:11 조회3,2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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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말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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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선생은

논리나 사상은 추상적 관념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로 설 때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감옥에서 만난 목수 할아버지의 예를 들고 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한 지식인의 서가가 한꺼번에 무너질 정도의 낭패감을 안겨준 것은

새로운 이론도, 위대한 상상가도 아니었다.

이마에 땀을 흘림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다.

땀 흘려 일하는 이 앞에서 열패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치면서 당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지만,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목수인 아버지 곁에서 지내고,

청년 시절을 목수로 보낸 청년 노동자 예수의 가르침은 이처럼 담백하고 단단하다.

그의 가르침에는 관념의 기름기가 배어있지 않다.

몸으로 익힌 지혜에는 관념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의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1:14)는 말로 요약했다.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그 말의 울림이 매우 깊지 않은가?

예수의 존재는 말씀의 현존이었다.

달리 말해 예수는 몸이 된 말씀 그 차체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마지막 말 가운데 하나는 "다 이루었다"였다.

그것은 예수의 화육(化肉)의 마침표가 아닐까?

화육을 그리스도론적 신비의 틀 안에만 묶어둔다면

그 말이 갖는 역동성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화육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신앙적 사건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근원적 말씀이 우리 삶의 배후에서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기독교인들은 말은 잘 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칭찬으로 알아듣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우스운 일이다.

그 말 뒤에 생략된 괄호 속의 말이야말로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말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가끔 가위에 눌리듯 나를 통해 나갔으나

미처 삶으로 번역되지 못한 말들에 짓눌릴 때가 있다.

유창할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가슴 근처에도 가 닿지 못하고

추락해버리고 마는 말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싶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당신은 말한 대로 사냐?"고 부르댈 것만 같아서

미리 그러고 싶다는 말로 방어막을 치기도 하지만,

몸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자의 추레함은 숨길 길이 없다.

차라리 성 프란체스꼬처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지친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무거운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을 도와주고,

가슴이 울울한 이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곧 설교라고 했다.

그런 설교를 하며 살고 싶다.

하면 되지 하는 대꾸가 들려오는 듯하여

다시 낯이 붉어진다.                        - 김기석 목사

 

 

. 오래 전에 읽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이야기가 있어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또 읽어도 다시 나를 내 자신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어제는 내 나이 또래의 자동차 정비하시는 사장님을 보면서

사람 사는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나를 겸손하게 하시는 좋은 이웃들을 만나는 일은 저에게 큰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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